인천 영화 예술의 선구자 최철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2008-09-21 23:33:58
인천 영화 예술의 선구자 최철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인천 최초의 영화 제작자 최철(崔鐵)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일부 영화 관계자나 연구자가 아니면 일반 시민들은 거의 없을 것 같다. 대다수 시민들은 아마 우리 인천에 영화사(映畵社)가 있었고 또 영화 제작자가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처음 들을지 모른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인천에도 영화사가 설립되었고 영화도 제작되었었다.
인천에 영화사가 있었던 사실은 먼저 당시 신문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해방 후 설립된 영화 회사 현황’이라는 제목 아래 “해방 후 우후죽순과 같이 생겨난 남한에서의 영화사는 다음과 같다”는 1948년 10월 26일자 경향신문 기사 속에 인천 영화사로 “건설영화사(인천부 송학동)”와 “국보영화사(인천부 중앙동 1의4)” 이 두 회사가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는 『인천시사』에 인천 영화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그러나 연구가 덜 이루어져서인지 초라하다 할 정도로 간략하다. 더구나 그 내용도 광복 이전의 것은 전무할 뿐만 아니라 확인되는 부분은 광복 이후에서 195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것으로 그때 제작된 몇 편의 영화와 그 제작자, 출연자 이름 정도가 전부다.
최철은 그러니까 이 영화사 속에 최초로 이름을 드러내는 영화 제작자이며, 바로 건설영화사를 차린 사람이다. 최철은 ‘한국의 아버지상(像)’이라고 일컫는 인천 신흥초등학교 출신으로 배우인 최불암(崔佛岩)의 선친이기도 하다. 최철은 사업가요, 언론인이면서 영화 제작에도 손을 대 아들 최불암과 함께 부자 2대가 영화인으로 이름을 남긴다.
“영화 예술은 다른 예술 부문과 달리 인천이 갖고 있는 독자성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분야이다. 독립 후 향토 인천에서 제작된 영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문화영화로는 건설영화사(대표 최철)가 1946∼1948년에 제작한 「무형의 악마」(이금용 출연) 「조국을 위하여」(손용진 출연)가 있고, 합동영화사(대표 이승하)가 1957년에 제작한 「복지강화」등 3편이 있다.
극 영화로는 건설영화사가 제작한 「수우(愁雨)」 「여명」이 있으며, 청구사진전문회사(대표 김철세, 최성연)가 제작한 「심판자」 성봉영화사(대표 원용일)가 1949년에 제작한 「사랑의 교실」(조수일 원작, 김성민 각색?감독), 합동영화사(대표 이승하)가 1951년에 제작한 「망향」(김성민 감독, 이향·주증녀 출연), 「돌아오지 않는 사람」(박성목 감독) 「사랑」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인천시사』에 보이는 ‘인천영화사(仁川映畵史)의 전반부이면서, 인천 최초의 영화 제작자 최철에 관련된 내용이다. 그가 인천 영화계를 선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당시는 인천 영화 예술의 뿌리가 깊지 못했던 데다가 자료의 부족, 그리고 그 시절을 중언할 인물들의 사망 등으로 이 이상의 자세한 내용을 보충할 수가 없다. 더불어 그가 제작한 영화 역시 오늘날에 남아 있지 않다.
‘첫 영화 「수우」는 1948년 8월 9일에 개봉했다. 흑백 35mm 영화로 각본에 이하영이고 감독은 안동화, 촬영은 홍일명이었다. 배역은 당시 일류 배우들로 김소영, 전택이, 이금룡, 신카나리아 등이 출연했다. 순수 극영화가 아니라 항구의 밀수배 두목과 그를 개심시키려는 카바레 마담과의 이야기를 다룬 경찰 홍보용 영화였다. 개봉은 시공관에서 했는데 흥행 성적은 실패였다. 해방 후 국민에게 민주 경찰의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제작된 영화였다.
「여명」 역시 민주 경찰 이미지와 밀수 근절을 테마로 한 계몽 영화로 중앙극장에서 개봉했다고 기록돼 있다. 1948년 10월 9일에 개봉된 35mm 영화로 각본 이명제, 감독 안진상, 촬영 한영모였고, 출연은 이민자, 권영팔, 이금룡, 황남 등이었다. 이 영화도 흥행에는 실패했는데 제7관구 경찰청이 제작 후원했다’는 것이 시사의 기록이다.
최철의 가계(家系)나 학력, 경력 등 개인 신상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언뜻 어느 기록에는 만주에 거주했었다고도 하는데 최철이 언제, 어떤 경로로 인천에 왔는지, 사업가로 알려졌으면서도 인천에 와서 신문사를 설립했다는 설(說)이나, 인천 최초의 영화 제작자가 된 내력 등에 대해서도 정확히 밝혀낼 자료가 없다.
다만, 최철이 신문사를 ‘직접 설립했는지는 명확히 확인할 수 없는 대로’ 인천 언론계에 종사했던 사실만은 『인천시사』 인천언론연표에서 짧게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아들 최불암은 자신의 회고 에세이에서 자기 선친이 ‘인천일보사’라는 신문사를 운영했다고 적고 있다.
‘1946년 7월 21일 인천기자협회 임시총회가 있었는데 상임간사로 이동오, 최철, 박명훈이, 간사로는 곽상훈 등 4명이 선출되었다’는 내용의, 지극히 간략한 기록이 인천언론연표에 보인다. 그리고 언론인으로서의 거명은 이 구절 단 한 번뿐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최블암의 텔레에세이(샘터사 간) 『인생은 연극이고 인간은 배우라는 오래된 대사에 관하여』 중의 한 회고기 형태의 글에서 아버지 최철이 인천에서 언론사를 운영했다고 증언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최불암 자신이 여섯 살이 되던 해 상해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인천 부두에서 첫 대면했으며 아버지는 그 후 인천에서 신문사와 영화사를 운영했는데, 아버지 사무실 입구에는 건설영화사와 인천일보라는 큰 간판이 붙어 있었다’는 내용이다.
아무튼 더 이상 상세한 내용은 없다 하더라도 이 두 기록이 ‘언론인 최철’을 확인해 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최불암의 같은 글 중에서 ‘최불암 자신이 1940년 인천 출생’이라고 밝힌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최철은 이 무렵 이전에 이미 인천에 거주하고 있다가 아들 최불암이 출생한 직후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상해 임시정부에서 일하던 작은 아버지를 찾아 상해로 갔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최철의 만주 거주’에 관련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인천 영화의 초창기 현장이라고 할 수 있는 최철의 영화사 사무실은 매우 북적거렸던 것으로 보인다. 늘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으며 당시 유명 배우인 복혜숙, 한은진, 이향, 신카나리아 씨 등도 자주 보였다’고 최불암은 기억한다. 이러던 차에 최철이 타계하고 마는 것이다. 최철의 나이 35세, 최불암이 인천신흥초등학교에 2학년이던 1948년에 영화 「수우」의 개봉 시사회를 하루 앞두고 서울 남산호텔에서 과로로 쓰러지는 것이다.
여기서 「수우」가 1948년 8월 9일 개봉되고 최철의 두 번째 극영화인 「여명」이 같은 해 10월 9일에 개봉되었다는 『인천시사』의 기록대로라면 안타깝게도 두 영화가 다 제작자의 사후에 개봉된 셈이다.
최철에 대해 알려진 사실이나 기록은 이것이 전부다. 너무 일찍 타계한 때문일 것이다. 현재로서는 그에 대한 연구나 조사가 더 진척을 이룰 수가 없다. 그에 대해서는 인천문화재단의 인천영상위원회가 더욱 깊고 세밀한 탐사를 벌이기를 기대한다.
최철. 그는 언론인이면서 인천 영화예술의 선구자였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인천 영화의 들판을 맨 먼저 걸어갔던 영화인이다. 해방 후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힘들게 영화를 제작하다가 일찍 세상을 떠난 우리 인천 영화사의 큰 존재--그가 최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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