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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철의 전망차

자상하고 조용한 분

by 형과니 2023. 5. 4.

자상하고 조용한 분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08-06-07 01:38:46

 

자상하고 조용한 분

 

 

진작부터 면식은 있었으나 그분을 처음 뵌 것은 1976년 늦가을이었다. 수원 농촌진흥청의 새마을연수원 운동장에서였다. 햇볕을 쬐고 계시길래 앞으로 찾아가 인사를 드리면서 신문사 편집국장인데 K모와는 초중고등학교 동기라고 말씀드렸더니 퍽 반가워하셨다. K군은 그분과 집안되는 사이였다. 그후 1980년 신문사 개편과정에서 주주로 참여하시더니 잠시 사장으로도 계시느라 뵙는 기회가 많아졌었다.

 

1988년 인천에 오래간만에 일간 지방신문이 부활하면서 웃어른으로 모시자 자주 신문사를 심방하셨다. 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분을 찾아뵙고 상의드리고 도움을 요청하면 생각해 보자시며 원만하게 처리해주시는 분이었다. 위세를 부리거나 당신의 주장만 내세우는 분이 아니셨다. 그분은 자상하고 천성이 조용한 분이셨다. 걸음걸이부터가 그러했다. 땅이 꺼질세라 조심조심 발을 딛는 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그후로 시간이 있을 때면 그분은 자주 불러주셨다. 이야기나 나누자는 것이었다. 중앙 정계와 지방 인사의 인맥을 소상하게 알고 계셨다. 자연히 인명록을 꿰맞추듯 화제가 길어졌었다. 젊은이들을 가까이 하시는 분이라고 느껴졌었다. 관심 가는 신간서적이 나오면 여러권 구입하여 고루 나누어 주셨다. 뿐만 아니라 청송심씨 회장으로 계시면서 가문의 전적을 간행하면 꼭 보내주셨다. 집필에 참고가 될 만한 고사가 발견되면 메모하여 보내주셨다.

 

1995년 인천의 해사업계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 일로 인천에 발걸음이 뜸하시더니 음식점으로 불러주시거나 여의도 사무실로 불러주시기도 했다. 워낙 연로하셔서 염려스러웠었는데 병원에 계시다는 전언이 있어 찾아뵈려고 하자 전화로 극구 마다 하셨었다. 그런데 어제 그분을 아는 친우들과의 점심석상에서 그분의 부음을 접했다. 아무리 만류하시더라도 생전에 찾아뵈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후회스러웠다. 그해 여름, 어려움을 겪으실 때 찾아뵈면 면도도 못하시고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며 허허실소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심명구 회장님 평안한 영생을 빌어드릴 따름입니다.

 

 

타계한 심명구 회장은?

인천항 근대하역업 선구자, 지역발전위해 한평생 헌신

20080529() 김도현kdh69@kyeongin.com

 

1982년 인천 경영자협회 창립총회 당시 심명구 회장(가운데) 모습.

28일 노환으로 타계한 ()선광의 창업자 심명구 전 회장은 인천항 근대 하역업의 선구자 가운데 한명이다.

 

고인은 기업인으로, 언론인으로, 또 체육인으로 한평생을 향토 인천발전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고인이 반석위에 올려놓은 ()선광은 창업 60년만에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제끼고 인천항 화물처리 1위 하역업체로 우뚝 솟았다. 이를 빗대 인천항만업계에서는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으로 표현할 정도였다.

 

고 심명구 회장은 19228월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했다.

1940년 당시 5학년제였던 서울 중앙중학교를 졸업하고, 1949년에는 한학자인 담원 정인보가 초대학장을 지낸 국학대학교(후에 고려대학교에 흡수·통합) 문학과를 졸업했다.

 

중앙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조선기계제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에 취업했던 고인은 19484월 동업자 2명과 함께 인천항에서 하역업과 통관업 면허를 받아내 '선광공사'를 창업했다.

 

1961년 주식회사 선광공사로 개편해 대표이사로 취임한 고인은 19944월 대표이사 회장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기 까지 인천항 하역업의 현대화와 항만 생산성 발전에 매진했다.

 

항만분야 육성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79년 대통령 표창을, 1982년에는 하역작업 현대화 등 해운항만 발전에 이바지해 항만 하역업계에서는 처음 석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1983년에는 노사협력을 통한 산업발전에 기여했다며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서도 고인은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인천지방법원 가사조정위원(1980~1993), 인천경영자협회 회장(1982~1997), 인천시 시정자문위원장(1986~1991), 인천시 체육회 부회장(1989~1992) 등으로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고인은 특히 장학사업에 관심을 가져, 지난 2002년 장학재단인 '선광문화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으로 취임한 뒤 지금까지 인천지역 중·고 및 대학생 900여 명에게 16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지역언론 육성에도 관심을 가져 1987년부터 1988년까지 경인일보 회장과 대표이사 그리고 고문을 역임했다.

 

한편, 고인이 일궈낸 ()선광은 인천항 하역업계 최초로 지난 199912월 코스닥에도 상장됐다.

 

지난해 인천항에서 2230t의 화물을 처리해 대한통운(2천만t)을 밀어내고 인천항 하역사 가운데 전체 화물처리 실적 1위로 올라섰다. 선광은 올해도 화물처리 목표를 전년대비 50% 가량 늘어난 3345t으로 잡는 등 인천항과 함께 비약적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추모사 / 인천항발전협의회 이기상 회장

 

늦은 출근길에 사무실로부터 회장님의 부음을 전해 들었습니다.

'신뢰를 저버리면 생명을 잃는 것과 같다'는 저의 좌우명을 새겨주신 큰 형님 같은 분.

 

인천 지역발전을 위해 평생을 드러나지 않게 일해 오신 심명구 회장님의 떠나가심을 슬퍼하는 듯 보슬비가 내리는 오전이었습니다.

 

"어이 이 회장, 오늘 점심시간 어때? 인천 얘기나 좀 들어보세. 나 지금 연안부두 가는 길인데 이따가 신포동에서 점심이나 같이 하세."

 

두어 달에 한 차례씩 다 아시는 인천 얘기를 들으시러, 또 저에게 가르침을 주시려고 인천에 오시면 꼭 찾아주시던 일이 이제 영영 가슴 속에만 남은 일이 되었습니다.

 

회장님, 아직도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 많은데, 또 그토록 애착과 기대를 가지셨던 우리 인천항의 웅비하는 모습을 보셨어야 하는데, 이렇게 황망히 떠나시다니.

 

20년 된 양복에 10년을 넘긴 구두를 신으시던 심 회장님의 몸에 배신 근검절약과 온화와 겸손의 미덕을 다시 한 번 떠올립니다.

 

"이 사장, 우리 직업이 지게꾼인 게 얼마나 행복한가? 우린 화주 앞에서도 근로자들 앞에서도 목에 힘을 주지 못하지 않나? 그게 좋은 것이네."

 

남의 금쪽같은 화물을 다루는 직업이니 모든 물건을 내 살과 같이 다루어야 한다는 장인정신을 가지셨던 분이었습니다.

 

추억하겠습니다. 회장님, 이제 편안한 곳에서 쉬십시오. 회장님의 온후한 가르침을 받고 오늘에 이른 저희 후배들도 인천항을 지키고 발전시키겠습니다. 머리 숙여 회장님의 명복을 빕니다.

 

2008528일 인천항발전협의회 회장 이기상 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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