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개항장 단상(斷想)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6-08 00:44:26
인천 개항장 단상(斷想)
▲ 강옥엽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홍예문에서 중구문화원이 있는 옛 전환국 터로 내려가다 보면 도로 중간쯤 왼편에 오래된 한옥 소슬대문이 거의 방치된 채 남아있어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아니 어쩜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것에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이런 감흥은 이미 25년 전인 1983년에 개항장 일대를 둘러보면서 인천의 역사적 변천을 담아냈던 『인천 한 세기』(신태범)에 고스란히 표현되고 있어 그 내부 모습조차 알 수 없는 현재로서는 무척 다행스럽다.
“문전 공터에는 요즈음 슬라브 주택이 들어서서 대문을 가리고 있다. 행랑채와 사랑채 그리고 명물이던 목련고목도 없어졌으나 대문 안에 연못을 둔 아담한 정원과 화사한 나이든 주목이 옛 모습대로 안채를 지키고 있다. 이 집이 인천에서 가장 유서가 분명한 대표적인 구옥(舊屋)이다. 이 한옥은 1892년에 일본의 기재와 기술로 인천여고 자리에 전환국을 건립할 때 전환국 방판(幇辦)으로 일본을 왕래하며 실무를 담당하던 안경수(安?壽)가 자신이 거처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그런데 간혹 이 한옥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바로 이 집의 주인공인, 한때 부평부사를 역임했고(1893), 또 독립협회 초대 회장(1896)도 지냈던 안경수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 갖지 않는 듯하다. 물론 안경수라는 인물의 다양한 정치적 행보 때문에 기억하기를 꺼려하는 측면도 없잖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개항을 전후한 시기 조선의 정치적 판도는 그야말로 열강들의 이권다툼 속에 격랑의 회오리를 피할 수 없었기에 한때는 친일파로, 또 한때는 친러파로, 그리고 다시 친일파 혹은 친미파·중도파로 그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인물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안경수 역시 그러한 시대를 대변했던 근대사의 한 인물이면서 인천과도 관련된 인물이다.
개항과 더불어 근대문물의 수용지가 됐던 인천은 우리나라 근대사 전개의 중심에 있었던 도시였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당시 시대상을 대변하는 인물들이 수시로 인천을 드나들었다. 백범 김구의 인천감리서 수형생활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고, 갑신정변 후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할 때 인천을 거쳐 갔으며, 친일파로 알려진 송병준(宋秉畯) 역시 인천 외리(外里)에 자신의 땅을 가지고 있었다. 임오군란 와중에 하나부사(花房義質)가 인천으로 피신해 오면서 북성동에는 그와 관련해 화방우물이 전설처럼 생겨났다. 조선의 통감정치를 주도했던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역시 자주 인천을 방문해 숙실로 출입했던 아사오카 여관(淺岡)이 중앙동에 있었고, 3·1운동의 영향으로 일제가 문화정치로 전환하면서 부임했던 사이토오(濟藤實) 총독의 별장 역시 인천에 있었다. 이렇게 인천과 관련된 여러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안경수(安?壽)다.
안경수(1853∼1900)는 몰락 양반의 가문에서 성장해 세도가 민영준(閔泳駿)의 통역관으로 발탁되면서 정계에 나왔다. 이후 별군직(別軍職)·장위영영관(壯衛營領官)·전환국방판(幇辦) 등을 지내면서, 일본의 문물을 수용하고 화약생산을 위한 제약소(製藥所) 설립과 신식화폐 발행에 주력하기도 했다. 당시 안경수는 철도 및 조폐, 즉 전환국에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인천에 별택을 지을 필요가 있었다. 친일파로 알려졌던 그는 군부대신을 지내고 철도 해운관계의 이권에도 관여하다가 을미사변 직후 친러파 이범진(李範晋)과 한패가 됐다가 쿠데타에 실패하자 이 별택으로 피신해 왔다. 이후 황제양위음모가 발각돼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900년 1월 이준용 역모사건(李埈鎔逆謀事件, 1894)을 고하지 않은 죄 및 황제양위미수사건(1898)에 관련된 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이 저택에는 첩이 살고 있었는데, 일본인의 기록에는 전혀 인가가 없는 적막한 동네였기에 첩이 자살하고 밤마다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적도 있었다. 그 후 안경수의 별저는 고타니 마스지로(小谷益次郞)의 집으로 사용됐는데, 그는 여기서 『인천부사』 집필에 참여했고, 세화회의 회장으로 광복 직후 일본인 귀환 사무의 책임을 맡기도 했다. 그 후 6·25사변 뒤에 박순정(朴順정) 여의사가 전동의원으로 사용했다. 현재는 모 재단의 소유로 돼 있다.
현재 인천은 도시의 발전을 추구해야 하고, 동시에 도시정체성도 정립해야 하는 입장에서 개발과 병행한 문화유산의 보존문제가 경우 경우마다 여전히 고심하지 않을 수 없는 과제다. 이를 위해 어떤 문화자원들을 남기고 반면교육으로 활용할 것이며 또 보존해 갈 것인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의 문제가 놓여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느끼는 인천 개항장의 이 역사적 흔적에 대한 감상이 다시 25년이 지난 후에도 누군가에 의해 역사적 감흥으로 남아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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