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의 옛모습과 현재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6-11-16 00:33:09
배다리의 지명 유래
중구 경동에서 경인전철 다리 아래를 지나 동구 금곡동 초입에 이르면 중앙시장 앞이 나오는데 바로 이 지역이 '배다리'다.
이 곳은 19세기말까지 화수동 괭이부리에서 수문통을 걸쳐오는 커다란 개울이 있었다. 밀물 때가 되면 바닷물이 들어왔기 때문에 경인철도가 놓이기 전까지는 이 곳에 배를 대어 놓을 수 있는 다리가 놓여 있어 '배다리' 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지금은 모두 복개돼 그 개울이나 다리를 찾아볼 수 없지만 이 곳을 아는 사람들은 1950년대 말까지도 먼 갯내음이 풍겨오고 갈매기도 몇 마리씩 날아들었다고 한다. 배다리는 원래 「교각을 세우지 않고 널조각을 이어 놓은 다리」 라는 뜻의 보통명사로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이름이다. 지역에 관한 이야기로는 배다리 주변에 창영초등, 동명초등학교와 인천상업학교 등이 있는데 3·1운동 당시 인천의만세운동은 이들 학교 학생에 의해 주도되어 시내 곳곳으로 이어졌다고 전한다.
또 율목동으로 올라가는 쪽의 배다리 공터에서는 서커스단이나 유랑극단, 떠돌이 약장수, 차력사들이 자주 찾아와 그 당시 별다른 구경거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주변에 살고 있던 어린이들은 기차가 지나가기 전 대못을 철길에 올려놓아 기차가 지나가면 납작해진 못을 갈아 장난감 칼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옛 추억이 담긴 배다리도 언젠가는 다른 옛 동네처럼 그 이름이 잊혀질지 모르지만, 아직은 그래도 우리 인천 사람들은 배다리라는 지명만큼은 널리 쓰이고 있다.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배다리
'배다리'는 아직도 시내버스 노선에 들어가 있을 만큼 인천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지명이다. 경인선 전철이 지나는 배다리 철교 아래 동구와 중구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을 말한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지만 배다리엔 19세기 말까지 수문통 갯골과 이어지는 큰 개울이 있었다. 그래서 밀물때면 중앙시장 입구와 송현초등학교 일대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작은 배를 댈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곳엔 배를 댈 수 있도록 만든 다리가 있었는데, '배다리'란 이름은 이 다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 말까지만 해도 배다리엔 밀물때면 비릿한 갯내음과 함께 갈매기들도 날아들었다고 한다. 또 배다리에서 싸리재고개로 올라가는 공터를 중심으로 유랑극단이나 떠돌이 약장수 등이 자주 찾아 당시 볼거리가 많지 않았던 지역 주민들에게 구경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배다리는 아직도 많은 인천인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배다리는 격랑의 역사속에서 한국인의 삶과 애환이 묻어난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개항과 함께 외세침략의 교두보였던 인천은 많은 외국인들이 몰리면서 크게 3개 구역으로 나뉘었다. 청국인과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각국의 조계(租界)를 설정해 중국인 거리, 일본인 거리, 한국인 거리로 분할된 것이다.
지금의 중구 신흥동, 송학동 일대는 일본인 거리였고 중국인은 중구 선린동에 자리를 잡아 이른바 '차이나타운'을 형성했다. 이 때 유일하게 한국인 거리로 남아있던 곳이 동구 화평동, 화수동, 만석동, 도원동 등지였다. 특히 개항 이후 급증한 일본인들에 의해 채미전거리(동인천역에서 배다리 입구까지의 거리) 끝쪽으로 밀려난 한국 상인들은 배다리쪽으로 몰려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인천의 주인이었던 한국인이 외세에 밀려나 형성한 한국인 거리, 바로 그 곳 한가운데에 '배다리'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배다리는 그 훨씬 전부터 인천의 중심지로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지만 본격적으로 한국인 거리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나서면서 더욱 더 인천인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채미전 거리에 조성된 청과물 시장은 인천 전역의 청과물이 모여들고 매매되는 상가로 번성했고 미림극장 뒷편 속칭 '양키시장' 자리엔 당시 인천 최대 규모의 공설시장이 세워져 갖가지 일상용품이 집결됐다. 일대 주민들 뿐만 아니라 많은 인천인들에게 배다리는 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경동, 유동, 도원동으로 이어지는 도로변엔 죽재상, 공구상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대규모 상가를 형성해 번창하기도 했다. 칼, 톱, 소쿠리, 바구니 등 일상생활 구석구석에서 필요한 생활용품을 손으로 만들어 파는 가내수공업상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배다리상가의 풍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1985년 공설운동장과 동인천을 연결하는 도로가 도시계획에 따라 도로확장부지로 결정되면서 상인들이 뿔뿔이 흩어져 지금은 10개 남짓한 상가만이 외롭게 배다리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배다리에서 전통솥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오정신씨(57)는 60~70년대만 하더라도 배다리솥상회 근처에는 솥을 실어나르기 위해 10여대의 리어카가 항시 대기를 하는 진풍경이 연출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며 "배다리 상가는 서민들의 삶과 애환이 속속들이 배 있었던 만큼 인천인의 사랑을 듬뿍 받아왔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일제시대 배다리 입구의 중심엔 2백50평 남짓의 큰 공동 우물터와 목욕탕이 있었는 데, 이 곳은 지금도 인천 토박이들에게 아련한 향수로 남아 있다. 자가수도시설이 없었던 시절 이 우물은 1937년 일본의 인천도시계획으로 매립되기 전까지 주민들간의 교류를 촉진하는 매개 구실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배다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또 하나 있다. 「배다리 헌책방 골목」이 바로 그 것. 동구 금곡동과 창영동의 경계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이 헌책방 골목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거리에 리어커와 노점상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형성됐다. 한때는 40여곳의 헌책방들이 밀집해 전성기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다가 70~80년대 경제성장기를 거치면서 빛바랜 헌책보다 새책을 선호하는 시류에 밀려 이제는 아벨·한미·창영·삼성·우리서점 등 10여곳만이 남아 헌책방 골목을 지키고 있다. 배다리 헌책방골목을 자주 이용한다는 김모씨(37)는 『모든 것이 궁핍했던 시절, 배움에 목말라 했던 선배들이 학문에 대한 갈증을 풀 수 있었던 곳이 바로 배다리 헌책방 골목이었다』며 『배다리 헌책방에선 번화가 서점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서점 특유의 옛향기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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