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교의 옛모습과 현재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6-11-16 00:36:06
인천 출신 시인들은 인천교를 시의 소재로 곧잘 삼았다. 그만큼 인천교의 형상이 시인의 가슴속에 각인돼 있었다는 얘기. 하지만 지금 인천교의 자취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인천교는 땅위에 다리가 붙어 있는 「기형적인」 형태로 명맥을 유지했으나 지금에선 그마저 사라졌다.
사실 여기저기 흙을 파헤치고, 고가도로 공사가 한창인(현재는 완공되어 사용되고 있음) 동구 송림동 옛 인천교 자리에서 갯벌이 펼쳐진 위에 다리가 놓여 있는 풍경을 떠올리긴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외지인들은 종종 인천에서 택시를 타고 가면서 마을버스 외부에 부착된 「인천교자동차매매센터」 광고를 보고 『인천에 다리가 어디 있느냐』고 택시기사에게 묻기도 한다. 이처럼 실체는 없고 추억만 남아 있는 다리가 바로 「인천교」다.
30대 이후 인천토박이들에게 인천교는 다리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 것은 마치 고향을 떠난 이가 타향에서 떠올리는 「향수」와도 흡사하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와 등에 짐을 진 촌부가 지나가고 자전거가 길을 막고 멈춰 있는 풍경 등 빛바랜 흑백사진에서 나타나는 인천교는 차라리 시골길에 가까왔다.
『방학 때면 온종일 인천교 아래서 망둥어를 잡았어요. 주안염전 둑길을 타고 인천교에 도착하면 곧바로 갯벌에서 갯지렁이를 잡는 게 순서였지요. 다음에 바닷물이 들어오면 대나무낚시대에 갯지렁이를 미끼로 망둥어를 잡았는데 보통 수십마리를 건져 올렸어요. 해질녁 집에 돌아갈 때면 온몸이 햇볕에 그을려 허물이 벗겨지다시피 했습니다. 그 땐 인천교에서 노는 게 왜 그렇게 재미있었던지···.』
대우중공업에 근무하는 황성구씨(39)는 『어쩌다 승용차를 몰고 인천교 인근을 지날 때 아이들에게 「여기에 다리가 있었다」고 설명하면 아이들이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짓는다』며 『산업화에 밀려 고향의 정취를 잃어버린 인천토박이들에게 인천교와 주안염전은 고향과 같은 의미』라고 말했다. 이 일대에선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처럼 개펄에서 아이들이 낚시를 하거나 게와 조개 등을 잡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인천교는 1957년 2월 공사에 들어가 이듬해 1월 길이 2백10m, 폭 12m의 규모로 완공됐다. 인천교는 「서곶」(지금의 서구지역)과 주안지역을 잇는 인천의 대표적인 다리로 그 전까진 나룻배로 바닷물길을 건너야 했다. 그래서 이 일대엔 「번지기 나루」란 이름의 나룻터 두곳이 있었다. 바닷물이 빠져 개펄이 드러났을 땐 돌을 놓은 징검다리로 건너고 물이 차면 나룻배로 건넜는 데, 인천교 가까이 있는 나룻터를 「윗나루」, 하류의 것을 「아랫나루」라고 불렀다. 당시 배다리와 송림동 시장이 성황을 이룬 것도 「개건너」동네와 김포 주민들이 나룻터를 통해 농산물을 실어내고 생필품을 사갔기 때문. 「개건너」는 지금의 가좌, 석남, 연희동을 이른다. 개펄을 건너야 갈 수 있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
인천교가 세워지면서 『저놈의 다리 때문에 밥 못먹게 됐다』는 노사공의 푸념과 함께 그 나룻터는 자취를 감추었다. 인천시사에 따르면 인천교는 한국전쟁 중 군작전상 그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만들었다고 한다. 인천교의 준공은 산업발전에도 도움을 줘 제1국도(서울~인천)의 교통난을 완화함은 물론 경인간 통행시간을 1시간에서 40분대로 단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후 인천교는 15년이 지난 1973년 노폭을 12m에서 30m로 확장했으나 80년대에 들어 대규모 매립공사로 이 일대 부지를 평지로 바꾸면서 다리로서의 기능을 상실, 도로(공단로)의 일부로 사용됐다. 그러다 인천시종합건설본부가 96년 3월 「원통로~인천제철간 도로개설 공사」에 착수하면서 지난해 아예 자취를 감춘 것이다.
이제 바닷물이 넘나들던 개펄위엔 동양 최대규모의 물류유통단지인 인천산업용품센터를 비롯 인천시립병원, 월마트 등 대형유통센터, 주차장 등이 들어서 있다. 동구가 2000년 말 준공을 목표로 추진중인 9만4천㎡ 규모의 「인천교 근린공원조성사업」이 마무리되면 인천교 일대는 다시 한번 새롭게 탈바꿈할 전망이다.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을 실감케 하는 인천교. 비록 그 모습은 사라졌지만 인천교는 인천인의 가슴속에서, 그리고 시인의 노래속에서 각박한 현실과 고향을 잇는 소중한 다리로 오랫동안 간직될 것이다.
『문득 고향은 마른 눈물자국 같은 건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랫만에 인천교를 건너와 바깥 송림 옛집 근처를 지날 때 웬지 횡경막이 따끔거렸다. 동구 밖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널따랗게 그늘 벌린 느티나무도 보이지 않고 오뉴월 아침의 금빛 햇살 사이로 달디 단 향기 퍼뜨리던 아카시아 숲도 사라져 버린 동네 -후략-" (최무영의 '바깥 송림을 지나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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