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 빌미 대륙침탈의 도구로 철도 탄생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20 00:57:56
화륜거 구르는 소리 우레같아 천지 진동하고
근대화 빌미 대륙침탈의 도구로 철도 탄생
<공동기획-‘우리문화유산 바로 알고 지키기’>
④ 개항과 근대문화이야기 - 근대화의 중심지 인천의 모습 2
글 / 문상범
여행이 고통에서 즐거움으로 바뀐 것은 교통수단의 발달 덕분이다. 19세기에 기차가 발명돼 철도여행이 시작되면서 비로소 사람들은 여행을 즐기기 시작했다. 1825년 영국의 스톡턴과 달링턴 사이에 철도가 부설된 것을 시작으로 4년 후 리버풀~맨체스터간 철도 영업이 시작됐다. 아시아에선 1853년 인도에 처음 철도가 놓였고, 이어서 일본의 경우 1872년에 철도가 도입됐다.
우리나라에선 1899년 제물포~노량진의 경인선이 개통과 함께 철도시대가 열렸다. 1896년 3월 29일 한국정부로부터 경인철도부설권을 따낸 모스가 1년 뒤인 1897년 3월 22일 우각리(현 인천시 도원동)에서 경인철도 기공식을 가진 후 2년 6개월이 지나 처음으로 개화의 상징인 기관차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이날 독립신문은 다음과 같이 경인선의 개통을 알렸다.
경인철도 기공식 모습(출처 : 인천시사)
“화륜거 구르는 소리가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수레 속에 앉아 영창으로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닿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경인선의 개통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모스가 1897년 3월 22일 인천에서 기공식을 거행하고 약 350명의 일꾼들을 모아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워낙 많은 자본이 들어가는 공사인데다가 기술 문제 등으로 더 이상의 진척이 어려웠다. 결국 1백만 달러에 철도를 대륙 침탈의 도구로 사용하려던 일본인의 손에 넘겨지고, 1899년 9월 18일에 인천~노량진 간의 33.2km의 철길이 생겨나 우리나라 최초의 증기 기관차가 달리게 되었다.
처음 노선 계획은 지금과 약간 차이가 있었다. 경인철도 부설 당시 숭의동 옛 전도관(현 예루살렘교회) 자리에 주한 미국공사였던 알렌 박사의 별장이 있었던 관계로 우각역을 개설했고 거기서 독각다리(숭의로터리 서쪽부근)를 거쳐 지금의 사동(인천여상 남쪽)에 종착역인 인천역을 설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곳 철도부지에 땅을 갖고 있던 일본인 지주들의 방해로 노선을 확정짓지 못하고 경인선 노선은 우각역을 거쳐 채미전 거리(옛 청과물 시장)에 있던 축현역을 지나서 응봉산을 휘어 감고 인천역으로 향했다.
1900년 7월 5일 한강철교가 준공되고, 같은 해 7월 8일 노량진~서울(당시의 서울역은 서대문 근처) 사이가 개통되어 인천~서울이 완전히 연결되었다.
경인선을 달리던 철마(출처 : 인천시사)
개통 당시의 경인선은 증기기관차 4대와 객차 6량, 화차 28량으로 운영되었고 인천역-축현역-우각역-부평역-소사역-오류역-노량진역 등 7역에 119명의 직원이 종사했다. 33.2㎞ 구간을 1시간 30분에 달렸으며 오전, 오후 하루 2차례씩 왕복했다.
지금의 수도권 전철요금은 비교적 저렴한 편이지만, 경인선 개통 당시 열차요금은 일반 서민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비싼 가격이다. 객실은 3등급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1등 객실의 요금은 1원 50전으로 외국인과 귀족들만 이용할 수 있었고, 2등실은 80전으로 형편이 그래도 나은 내국인이, 그리고 3등실 요금은 40전으로 여성과 서민들이 이용할 수 있었다. 이를 당시의 물가 시세로 환산하여 보면 면포 한필 값이 1원 정도 했으니 1등실 요금보다 더 쌌고, 2등실 객실 요금은 계란 100개와 3등실 요금은 닭 두 마리의 값어치와 같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 일제가 경인선을 포함한 경부선, 경의선을 부설하기 위해 발버둥 친 진정한 속뜻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일본은 틈만 나면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을 한국의 근대화를 위한 길이었다고 계속 떠들어댔지만, 조선의 철도는 대륙침탈과 식민지 경영을 위해서 빼 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사죄와 피해자들에 대한 납득할만한 보상 등도 없이 역사를 왜곡하고 망언을 일삼는 일본의 태도를 예의 주시해야할 것이다.
당시의 근대 문화는 경인선 철도에서 보여 지듯이 우리나라의 굴절되고 왜곡된 근대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우리의 근대 문화는 새로운 문명세계로의 진입이기도 하지만 한편은 제국주의의 착취와 수탈을 위한 지배의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비극이라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 본 기사는 인천시 인터넷신문과 해반문화사랑회가 인천의 근대문화유산을 바로 알고 지키기 위해 공동기획한 글로 필자인 문상범 님은 인천고등학교 교사이면서 해반문화사랑회 감사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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