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암동 -정희량의 일생
인천의관광/인천의전설
2007-01-20 00:51:54
검암동 -정희량의 일생
검암동 앞산을 허암봉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조선 전기의 강직한 관리이자 도학자이며 차와 술에 심취해 많은 일화를 남긴 정희량의 호에서 유래한다. 지금도 산의 북쪽 중턱에는 그가 찾아와 조용히 숨어 살았던 암자 흔적이 남아 있다.
정희량의 출생지는 김포 또는 고양의 한강변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아홉 살에 논어를 읽었는데 독후감을 묻는 아버지의 질문에 척척 대답했다. 질문의 의도를 송곳처럼 꿰뚫어보는 눈이 있고 글에 실린 주제를 그것에 맞춰 정리하는 총명함이 보였다.
청년기가 되면서 그의 학문은 더욱 빛났다. 아버지는 그를 큰 유학자인 김종직의 문하로 보냈다. 그는 거기서 많은 인재들을 만났으며 때때로 학문이나 세상일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김종직은 그를 매우 신뢰했다.
“너는 사유하는 깊이가 바다처럼 깊고 넓구나. 그게 나라 일에 이롭게 쓰여야 한다.”
그는 아버지와 스승의 기대대로 과거에 장원 급제해 생원이 되고 연산군 원년 다시 대과에서 급제해 예문관 대교가 되었다. 그는 젊은 임금 연산군이 제왕의 도리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상소를 올렸다. 그 상소는 그를 연산군 에게 미움을 받게 하는 까닭이 되었다.
그는『성종대왕실록』편찬에 참여했다. 그러나 무오사화 때 작은 트집이 잡혀 장형 100대를 맞고 평안도에 유배되었다. 그때 모친상을 당하였으나 유배중이라 집에 오지 못했다. 이듬해 귀양살이에서 풀리자 어머니 묘를 지키는 데 충실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어두운 구름이 몰려오고 있소. 격분하기 잘하는 전하의 손에 여러 사람들이 피를 흘릴 것이오.”
아내가 조용히 물었다.
“당신은 이미 귀양살이를 하고 왔는데 또 벌을 받을 일이 있나요?”
“나는 죄가 없지만 죄가 있는 것이오. 전하 곁에서 늘 달콤한 말로‘전하의 통치야말로 훌륭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 죄요.”
그는 그렇게 말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곁에 데리고 있던 종에게 말했다.
“산나물이 먹고 싶구나. 나물을 캐 오너라.”
종이 그의 곁을 떠나 산으로 올라가자 마지막으로 어머니 묘에 절을 하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떠났다. 마을에서 가까운 행주 강가에 신을 벗어 놓았다. 자신이 물에 빠져 죽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 길로 부평 땅 검바위 마을(현재의 검암동)로 왔고 뒷날 자신의 아호를 따서 허암봉이라고 이름이 붙은 산 위에 초막을 짓고 이름 없는 도인처럼 차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이 조금씩 알려지고 부평 부사가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그는 향나무에 옷을 벗어 걸어 놓고 다시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한강으로 갔고 거기서 시 한 편을 남기고 배를 타고 사라졌다. 그가 종적을 감춘 것은 곧 또 한 번의 사화가 일어날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허암은 자취를 감추기 전에 높은 학문의 경지에 올랐다.『허암선생 시집』은 천하의 명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의 유력한 국학연구 번역 단체인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그의 전집인『허암유집』을 번역 간행했고 국내 대학의 권위 있는 한문학자들이 그의 글을 연구하여 많은 논문을 썼다.
그의 이름은 도(道)와 선(仙), 단(丹) 등 한국의 정신 수련 분야에서도 나온다. 그리고 채식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채식의 한국적 전통으로 천채환을 제일로 친다. 그것은 정희량이 여러 가지 신비한 약초를 섞어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한국의 전통 다도(茶道)에도 중요하게 등장한다. 지금 허암봉 기슭에는‘정희량 차샘비’가 세워져 있다. 그의 풍모는 술 마시기에 관한 이야기들 속에도 전설로 남아 있다. 조선 시대 중기와 후기에 걸쳐 술꾼들에게‘정희량 모주 퍼 마시듯 한다’는 속담이 있다.
그의 이름은 민속주를 만드는 주조법에도 등장한다. 담가서 사흘 만에 걸러 마실 수 있는‘혼란주’라는 술이 있었는데 그것을 창안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신선로를 발명했다고도 한다. 그가 사화를 예견하고 산 속에 숨어 지낼 때 이것을 고안해 각종 야채를 넣고 처음 끓여 먹었다. 사람들이 그 맛에 경탄하고, 조리하는 그의 모습이 마치 신선과 같아 신선로라고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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