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고 싶은 인천-길에서 묻다/ 흔적들5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8-07 00:53:14
'전시·문화의 터' 역사 속으로 …
흐르고 싶은 인천-길에서 묻다/ 흔적들5
57년을 산 삶의 무게가 담기고 얹힌, 무심한 말들의 무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세계를 읽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해석하는 노력이 담긴 시인의 함축된 한마디 말 "다 그런거지 뭐" 성문 최병구의 말이었다.
81년의 여름은 여느해 여름 못지않게 더운 해였다. 아들을 잃고 가족이 이산되는 슬픔을 간직한 채 나뭇잎 바람결에 실어보내 놓고는 긴 침묵의 길로 갔다. 세상만사 다 그런거지 뭐 있겠습니까만 나무 한 잎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같은 인생을 살다 갔으니 애석하고 말고요.
금년 7월28일 본보 '오늘의 소사'란 "시인 최병구 사망" 일곱 낱내를 보니 그 애처로움이 더하네요.
그때(81년) 그날로부터 49일째 되던날 송학동 3가 5번지의 '이당 기념관' 정원에는 동고동락의 인물들이 적잖이 왔었습니다. 안 올 사람 빼고 올 사람들은 말입니다. 그 주체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막연히 문단 선배라기보단 그래도 인천문단의 지주의 한 분이신지라 손설향을 비롯 고촌 김영일, 현 문협회장 김윤식, 김진안, 이정 장주봉, 춘정 이근우, 청람 전도진, 김구연, 김학균 등등 한 줌 그늘진 나무아래서 치렀습니다.
시사(詩史)에 찬연히 빛난 고금인(古今人)들 거개가 어두운 생애를 보낸 것은 사실이지만 조금만 자기를 위해서 살았다면 불운하지는 않았을거라는 뭇사람들의 말, 한 시대를 순정(純情)의 시인이 감당키는 너무나 어려운 시대가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개항기 맥코넬 자택, 이당 김은호 기념관으로 사용되다가 중부교회로 변천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터다. 최병구 시인의 49제가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70년대 말에 생겨난 이당 기념관이 문닫기까지는 인천 미술사에 큰 업적을 남긴 곳이기도 하지만 개항장 시기부터 역사를 더듬어 보면 인천 해관의 8대 관장 맥코넬(영국인)의 저택으로 사용된 건물로 알려져 아름아름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학도들에게 눈에 뼈박힌 건물이었으나, 78년 이당 화백은 고향에 정착하여 여생을 마치고 기념관을 세운다고 발표하여 '후소회'(이당화백의 제자모임, 한국화 그룹)와 유족 협의하에 기념관이 이듬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꼭 있어야 할 것들은 오래가질 못하는 이 땅의 아쉬움이라고 해야 할까요 버텨봄 즉도 하건만 소리없이 (조흥은행에 근무하는 사위에 의해 매각됐다고 함) 기억에서 멀어져 오늘날은 그 옆 중부교회 교육관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숱한 전시회와 문화의 터로 이용했던 '이당 기념관'의 제 몫중에 빼놓을 수 없는 몫이란 한국화의 거성들로 뭉쳐진 후소회(後素會) 인천전을 꼽을 수 있겠고 다음으로 서산출신 한국화를 하던 운암 최병석(고인)의 결혼식장으로 이용되었던 것이 기억에 바람같은 이야기다.
간짓대(장대)로 끌어 내릴 수 있는 지척의 이야기론 같은 번지내에 칩거했던 서양화가 연해국의 생게망게한 스토밍 한조각. 서양화가 황추의 제자로 송도고교 미술교사를 어느 한 날 계획이라도 있는 듯 박차고 나온 연해국, 자기 구제의 한 몸짓으로 전업 화가의 길을 택하고자 새롭게 출발하는 의지로 '성공회' 옆 길가 집에 거락(居樂)하며 그림을 그렸지만 축축하게 젖은 옷을 입은 듯 남루한 원죄의식을 깨지못하고 화가(본인)를 향해 질책하며 종주먹질을 해대던 숱한 인물들을 채 거두지 못하고 먼길, 먼 평화를 찾아갔다. 윗턱 아래턱 없이 호형호제하던 주붕(酒朋) 그도 그렇게 갔다.
송학동 비탈길도 해 떨어지며 사계가 말없음표를 달고 적막하니 보행자들을 압도하며 때로는 편안하게도 한다. 시선을 동(動)시키지 않아도 앞바다의 밤 불꽃은 휘황하니 삶의 비의(悲意)와 정한(情恨)을 낳고 있다. 88년 올림픽이 끝난 직후 가시지 않은 흥분이 이 길, 저 길 골목은 골목대로 괴어있었다. 그 길의 내리막 끝, '동보성'이란 중화요리집, 들고 나는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하다.
<개항과 양관역정> <은어>등의 주인공 소한 최성연의 출판기념회가 열리고 있었다. 시조선집 <갈매기도 사라졌는데>(교육문화출판사간 88.11.5)를 상재, 인천문화원장 김길봉씨의 발의에 의하여 마련된 출판기념회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사회자 이석인의 첫 말문에 이어 김학균의 약·경력보고 그리고 시조시인 이태극 선생의 축사로 이어나간 그 날 행사는 당신께서 33년만에 시조시집 간행의 희열을 몸으로 느낀 날이었다.
여적(餘滴)을 달아 이해도를 높인 선집으로 인천문학사에 금자탑적인 시집이 아닌가 한다. 현대시조의 개척자로서 향토사학의 기틀을 마련한 선각자로 추앙돼온 소한 선생의 흔적이 묻은 송학동 길은 어머니의 흰 적삼의 소맷길 같은 길이다.
오를 때 모르는 언덕길 내려올때 생각나는 것 하나 있네요.
어머니 심부름하러 온 세상/심부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어머니 저 왔어요"
※조병화 '꿈의 귀향'인용
/김학균 시인
#인천 #김 학균 #흐르고싶은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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