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조망 거리만큼 아픈 시대의 초상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10-01 20:50:18
철조망 거리만큼 아픈 시대의 초상
길에서 묻다 흔적들 12
자연을 예찬하는 시가(詩歌)를 뜻하는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라면 전라도 담양이 낳은 '송순'이 아닐까 생각한다. 누정(누각과 정자)과 원림이 있고 수려한 산수가 있어 그리 됐는지는 몰라도 그곳은 이맘때 배롱나무 꽃이 빨갛게 피다못해 붉은 물감을 엎질러 놓은 듯 붉게 타오르고 있다.
배롱꽃은 100일을 핀다해서 '백일홍'이라고도 불렸고 배곯던 민초들이 그 꽃이 지면 쌀밥을 먹을 수 있다하여 '쌀나무'라고도 불렸었다. 허나 가을이 와도 좀처럼 꽃이 지지않는 배롱나무는 미움의 나무이기도 했다. 세 번씩 새 순이 돋아 또 꽃을 피우니 미움이 없을 수 없었다.
을사사화때 추풍낙엽처럼 목이 떨어지던 올곧은 선비들을 기리며 지은 '송순'의 <석춘가> 한 대목을 읊어보면 "꽃이 진다고 슬퍼마라. / 바람에 날리니 꽃의 탓이 아니로다…" 했던 것도 실 사물의 꽃 배롱을 보며 읊었던 것으로 예로부터 선비들이 정자나 서원에 또는 집터에 배롱나무를 한두 그루쯤 심어 의미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붉은 꽃은 화를 물리치고 척화(斥禍)의 뜻을 담고 있으며 불붙듯 피어나는 모습에서 학문(예술)의 번성을 기원했던 의미. 그래서 배롱나무는 '선비나무'이기도 했었다.
한 개의 사물 속에서 우주를 보겠다면 접사렌즈가 있어야겠지만 이 배롱나무의 붉은 꽃무리를 볼 양이면 번들렌즈로도 아무 지장없이 족한 그 꽃의 기억은 제물량 길 해안동 2가 골목과 골목으로 연결된 판잣집에서도 피었었다. 그 시절 에레나 누나들의 셋집 봉당에 놓인 세숫대야에서.
저녁부터 엄습하던 아픔이 밤이 되며 고통으로 닦아가던 누나의 새벽은 꼭 그렇게 배롱나무 꽃을 토해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 몸이 줌(ZOOM)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옳겠다. 코쟁이들에게 당하는 밤샘 시달림이 누적되고, 내 몸 돌볼 틈 없이 아파오며 조금씩 사그라지는 연인만의 병이 배롱나무 붉은 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퍼렇게 윤기없는 입술, 핏기없이 창백한 얼굴, 십리안으로 퀭하니 들어간 눈, 그 눈자위에 서린 슬픔의 두께 내려쬐는 빛을 바라보지 못해 손바닥으로 가리고 쳐다보는 세상의 모습은 인화지에 어떻게 투영 됐을까.
하여 우리의 악동들은 밤이면 밤마다 거사(?)를 치렀던 것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새 주소 길 중봉로가 생기기 전인 50년대 지금의 제물량 길 해안동 2가는 월미도 길을 이어가는 철조망의 연속으로 다국적군의 경비가 철통같아 접근이 어려웠었다. 해군의 징모 업무를 보고있는 지금의 서도회관 옆은 대한통운(마로보시)과 전매서로 쓰였던 건물, 후로는 인천일보의 사옥으로도 쓰였지만 막다른 길로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접근금지! 5m이상 접근하면 발포함"이라는 철조망의 팻말은 군데군데 붙어, 막연한 공포가 아니라 내장속까지 스미는 공포를 자아냈었다. 거사(?)는 이곳에서도 이루어졌던 것이다.
배롱꽃이 세숫대야에서도 피었던 것은 다 코쟁이들의 우리의 순이 누나들을 괴롭혀 일어나는 일로 악동들은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위험천만한 일이란 것은 모르고 저지르는 일이었지만. 은행 알만한 차돌을 깡통 가득 준비한 악동들은 밤이 되길 기다려 풀 숲 아니면 건물을 방패삼아 포진, 누름치기(고무줄 총)를 당기며 코쟁이 보초를 겨누었던 것이다.
하고 있는 짓이 애국이냐 아니냐는 것도 알고 있지도 못한 나이지만 눈만 뜨면 보는 해안동의 일상은 우리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신작로 길로 저녁이 내려앉을 쯤 그 여인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기억에 없었을 것이다. 다만 얼굴에 어린 저녁의 노을이 내일로 이어지는 통증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자정이 넘어 휑하니 비어있는 길이 순이를 더 슬프게 정처없을 수 밖에.
어느 한 날 '고여와' '창천'은 "인생을 당겨오지 마라" 했고 "인생에 네가 다가가라" 했었다. 어린시절에 보고 들은 이야기를 지드거니 쏟아냈을 때 했던 말이 이제사 무엇인가 좀 알것 같으니 단란하고 아름다운 세계관을 지켜낸 예술인 그들이 아닌가.
추사의 <새한도>속 조용한 집 창속으로 책을 읽는 선비의 모습이 궂긴소식 남기고 간 '고여의 청량산 밑, 거락(居樂)처 앞마당에 배롱나무 한 그루' 눈에 선하다. 좀처럼 한수이북에서 보기힘든 그 배롱나무 붉은 꽃이 '고여'(古如)의 가슴에도 피었습니다.
/ 김학균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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