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화교 125년史 한눈에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10-11 20:35:14
인천 화교 125년史 한눈에
화교협회 내일부터 역사자료 전시회
중국 산둥성 상인들은 화상(華商)특유의 거대한 자본과 풍부한 경험을 앞세워 1883년 개항한 인천 상권의 주류를 형성한다. 포목 수출입과 유통을 주름 잡았다. 여기에 항만과 마차 수송 등으로 물류를 독점하다시피 한다.
1895년 청·일전쟁의 패전과 1911년 신해혁명에 따른 청(淸)왕조의 패망, 1913년 인천 청국조계지의 철폐로 인천화교의 경제활동은 하강곡선을 그린다. 1920년대 삼베와 비단, 광목, 소금, 고추 등 생필품을 다루던 인천 화교들은 음식점과 요리를 중심으로 인천 상권의 한 축으로 자리잡는다.
공화춘과 중화루, 동흥루가 생기는 계기였다. 여기에 호떡과 만두집 등 요리집도 성행했다. 또 산둥성 옌타이에서 채소 종자를 들여와 인천 근교 일대에 농장을 경영했고, 생선과 함께 유통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푸성귀전이었던 신포시장에 채소공급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1931년 만보산 사건으로 인천 등지에서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나면서 포목점, 청요리, 채소가게, 이발소 등 화교 상점이 문을 닫았다. 인천의 상권의 중심은 일본인에게 넘어간 것이다. 해방이후 무역업이 일시적으로 호항을 누렸으나 중국과의 국교단절로 크게 번창하지 못했다.
1960년대 국내 화교들은 역경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1961년과 1962년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와 2차 통화개혁으로 거액의 현금을 보유했던 화교들은 그야말로 수난의 시대를 겪는다. 1970년대 국내 화교들의 ‘엑소더스’가 이뤄졌다. 1970년 4천401명에 이르던 인천의 화교는 1987년 2천690명으로 급감했다.
이어 1968년 택지용 660㎡(200평), 상업용 165㎡(50평)로 묶었던 토지소유권을 1998년 외국인 토지취득을 전면 허용했고, 1999년에는 화교 소학교(1901년 건립)와 중산학교(1957년 건립)가 정식학교로 인가됐다.
2002년에는 영주자격 제도가 만들어졌다. 이제 중구 차이나타운를 중심으로 화교의 문화는 인천의 독특한 문화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오는 11일 인천 화교 125년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된다. 화교 역사자료 전시회가 옛 청국영사관 별관자리인 화교협회 별관에서 열리는 것이다. 개항이후 125년에 걸친 화교와 한국의 근현대사와 관련된 희귀 자료들이 특별 전시된다. 여기에는 고서와 사진, 손문 사진전, 경극 소품도 선뵌다.
이날 한중문화관에서는 오후 2~9시까지 중국 4대 명품요리 특별전이, 12일에는 역시 한중문화관 주차장 특설 무대에서 중국 산둥성 경극단의 공연도 펼쳐진다.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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