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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옛모습

인천의 동제(1)

by 형과니 2023. 5. 16.

인천의 동제(1)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10-31 13:36:22

 

인천의 동제(1)

문상범 제물포고등학교 교사

 

 

# 동제는 전통사회의 기초단위

 

우리나라 대부분의 농어촌 마을에서 마을 공동제의인 동제(洞祭)를 지냈다. 마을은 인간 생활의 가장 절실하고 기본적인 욕구를 반영하는 생활 공동체로, 전통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기초단위이다. 또한, 경제적 생산과 종교적 성소(聖所)의 기초단위이다. 동제는 가정에서 지내는 개별제의(가정제례)와 구분돼 주민이 공동으로 지내며 개인의 소망보다는 마을 전체의 이익을 기원하는 민간신앙이다.

 

이 제의에는 종교적 의미와 마을 공동체의 유지라는 사회적 의미가 담겨 있다. 주민들은 마을 수호신을 신당(神堂)에 모셔 놓고 정기적으로 의례를 치르며 마을과 주민이 잡귀와 재앙에서 벗어나 안녕과 풍요가 유지되도록 기원했고, 마을의 질서와 조직을 유지해 나갔다.

 

목상동 당우물

 

동제는 고대 이전에 발생한 유구한 전통을 지닌 중요한 토착 신앙 중 하나이며 마을 사람들의 가치관이 반영된 마을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서구 문물이 밀려오고 기독교가 전래되면서 그 기능과 역할이 축소됐다. 특히 일제 탄압 시대에는 미신으로 지목돼 억제됐고, 경제개발이 가속된 1970년대에 들어서는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며 우리 스스로 파괴를 서슴지 않아 거의 명맥이 끊겼다.

 

이러한 민간신앙의 멸시 현상은 인천에서 더 심해 다른 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인천에서는 찾기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현지조사 결과 인천의 여러 마을에서 동제의 흔적을 찾을 수 있어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 당제 계통과 산신제 계통

 

인천지역의 동제는 대체로 당제(堂祭)’ 계통인 당제, 당고사, 도당제, 도당굿, 당굿등의 이름과 산신제(山神祭)’ 계통인 산제, 산신제, 산고사, 산치성등의 이름을 사용했다.

 

당제 계통의 이름은 본래 도당굿을 했으나, 나중에 간소하게 제의를 지냈던 마을과 주기적으로든, 마을의 형편에 따라서든, 몇년에 한 번씩은 굿을 했던 마을에서 주로 사용했다. 유교 형식과 무속(巫俗) 형식을 겸해 제의를 지냈던 마을에서도 이 계통의 이름이 사용됐다.

 

강화도 외포리당집

 

산신제 계통의 이름은 처음부터 굿보다는 유교 형식으로 제의를 지냈거나, 도당굿을 버리고 유교 형식으로 새롭게 제의를 지냈던 마을에서 주로 사용됐다. 지역적으로는 장수동, 수산동, 남촌동, 도림동, 동춘동, 계산동, 용종동, 효성동, 가정동, 신현동, 연희동, 왕길동 등 주로 남동구와 서구에 있는 마을에서 당제계의 이름이 사용됐고, 영흥도의 버드니 마을과 업벌 마을, 영종도 구읍 마을, 신불도 등의 섬에서도 사용됐다.

 

산신제 계통의 이름은 내륙에서 농업이 주업인 마을에서 나타났는데, 과거에 부천이나 김포에 속하다 인천으로 편입된 농업지역에서 이 이름이 주로 사용됐다. 계양산을 경계로 북동쪽에 있는 검암동, 시천동, 다남동, 목상동, 동양동, 박촌동 등의 마을에서도 이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이 지역들도 얼마 전까지 농업이 주업이었던 곳이다. 영종도나 용유도의 일부 마을에서도 이 이름이 보이는데, 이곳들은 생업이 어업보다는 농업을 위주로 하는 마을이었다.

 

연희동 신수

 

 

인천의 동제는 많은 변화를 보였다. 대부분의 마을에서 도당굿 대신 유교 형식으로 제의를 지내며 동제의 내용과 형식에 큰 변화가 있거나 심지어 소멸했다. 도당굿과 동제가 사라지거나 크게 변화하는 때는 8·15 광복과 6·25 전쟁을 전후한 시기다. 최근에는 지역개발과 기독교의 영향이 크다. 지역개발로 제당이 없어지며 동제가 사라졌다.

 

동춘동의 동막과 소암마을, 남촌동, 용종동, 장수동의 수현마을, 신불도 등의 마을이 이에 해당한다. 경서동, 영종도 등의 여러 마을은 기독교가 전파되며 주민의 참여가 적어져 동제가 소멸됐다. 도림동은 제의를 주관할 사람이 없어 제의를 지내지 못하고, 왕길동의 안동포 마을은 주업인 어업이 피폐해 지며 제의 거행의 명분이 사라지며 자연히 소멸했다.

 

또한, 경서동 등의 마을에서는 제당이 다른 장소로 옮겨지는 수난을 겪었고, 연희동, 가정동에서는 대표적인 신체(神體)의 하나인 신수(神樹 ; 신목)가 고사(枯死)했다. 매해 이엉을 엮어 덧씌워 가며 신체로서의 위용을 과시했던 터주가리는 관리소홀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토록 신성시되던 당과 그 주변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은 예전과는 달리 당의 영험을 그냥 옛날 얘기로 치부하고 있으며, 동제 관련 금기도 거의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나 마을에 따라서는 동제에 대한 애착이 여전해 쓰러져 가는 당집을 다시 짓기도 하고, 당집이 없이 당터만 있던 마을에서는 동제를 거행하고자 제단(祭壇)을 새로 설치했다. 노인회가 활성화돼 있는 마을에서는 아예 제의를 노인회에서 맡아 매해 빠짐없이 제의를 지낸다. 제의 비용도 주민들에게 일일이 추렴하기보다는 마을 기금이나 기부금으로 충당하고, 동사무소에서 제사 비용 일체를 지원받는 마을도 생겼다. 동제가 시대에 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마을 제의로 재탄생했다.

 

신현동 동제터

 

# 마을공동체 신앙 규명의 당위성

 

인천의 마을 공동체 신앙을 다각적인 관점에서 정확하게 규명하는 것은 인천의 모습을 찾는 작업 중의 하나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우리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사라지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다시 찾아 그것을 바로 알고 계승하는 기회를 얻는 작업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동안 외래문화에 깊이 빠져든 나머지 소홀히 했던 우리 민족의 혼과 맥을 찾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우리의 정신적 지주로 삼아 계승 발전시켜 새 시대에 맞는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우리가 전통문화의 기반 없이 외래문화에 동화한다면 우리의 전통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민족의 사상적 기반마저 무너질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과 맥을 우리의 공동체 신앙에서 찾아보는 것도 의의가 있는 일이다.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