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동제(3) -서구 경서동 고잔 마을 동제-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11-05 21:06:39
인천의 동제(3) -서구 경서동 고잔 마을 동제-
글쓴이 = 문상범(제물포고등학교 교사)
인천시 서구 경서동은 경명현 서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원래 부평군 석곶면 고잔리였으나 1940년 인천부로 편입돼 1946년에 경서동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 경서동은 원래 해안 마을로 염전이 많았으며 청라도, 난지도, 소문점도, 사도 등의 섬이 이에 속했다. 1960년대에 농경지 조성을 위한 매립을 시작으로 1980년대 중반 대규모 간척사업이 진행되며 마을 모습이 크게 바뀌었다. 현재는 경제자유구역청 청라지구에 포함돼 경서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며 신흥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 매년 봄, 가을 동제
이곳에서는 매년 봄, 가을마다 동제를 지냈다. 예전에는 가을(10월 초)에는 도당굿을 하고, 봄(2월 초)에는 당고사를 지냈으나, 1960년대 이후 봄, 가을 모두 당고사를 지냈다. 그 후에도 중간 중간 굿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지역 개발로 동제터가 사라져 그 명맥이 끊기고 말았다.
제의 이름은 당고사(축문에는 산제로 돼 있다)이다. 도당이라고도 불리는 고사터는 웃당과 아랫당이 있다. 고사터가 개인 소유라 당집을 지울 수 없어 시멘트로 제단만 만들어 놓았다. 웃당에서는 당할아버지와 당할머니를 위하고, 아랫당에서는 당을 지키는 수문장을 위한다. 예전에는 웃당에 운연동 음실마을에서 볼 수 있는 터주가리가 있었고, 그 안에는 엽전 몇개가 들어 있는 작은 단지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당나무로 소나무가 있었으나 이마저 고사했다.
제일은 과거 도당굿을 할 때는 만신이 날을 잡았으나 당고사로 바뀌고는 음력 2월과 10월 첫 정일(丁日)로 못박았다. 만약 부정한 일이 생기면 당고사는 다음 정일로 연기했다. 당굿도 연기해야 했지만, 당굿은 여러 준비가 필요하고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뒤로 미루는 것이 어려웠다. 마을 노인들의 기억으로는 부정이 발생해 제의를 미룬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이 마을 주민들은 한 번의 부정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당고사의 영험이 대단한 것으로 생각했다.
제의를 주관하고 준비할 당주는 9월 중순 무렵 마을회의에서 부정이 없는 사람 가운데서 정한다. 마을 주민이 서로 돌아가며 당주를 했기 때문에 다른 마을과는 달리 나이가 적은 사람도 당주가 되기도 했다. 당주는 제물을 마련하고 음식을 준비한다. 당주 집에는 금줄을 치고 대문 앞에 황토를 뿌려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제사 비용으로 쌀 1되 정도를 걷었다. 이 쌀을 팔아 제물을 마련했으나 쌀을 걷는 일이 번거롭고 무거운 쌀을 들고 다니기가 어려워 현금 5천 원에서 1만 원 정도를 걷었다. 가을에 걷어 이듬해 봄 제의 비용까지 사용했다. 매년 60여 가구가 참여했으나, 교인들은 내지 않는다. 두 번의 제의를 지내려면 50만 원 이상이 필요했으나, 걷힌 돈은 20만~30여만 원 정도였다. 부족 비용은 마을 유지, 사업체 등의 기부금과 동사무소의 보조금으로 메웠다.
주요 제물은 팥떡, 숭어, 북어, 소고기, 밤, 대추, 사과, 배, 감 등이다. 도당굿을 할 때는 소를 잡기도 했다. 조라(제주)는 본래 당고사 때는 당일 아침에 빚었다가 쓰고, 도당굿 때는 3일 전에 빚었다가 썼으나, 나중에는 약주를 사서 썼다.
# 동제 지내기
제의는 0시 정각에 시작했다. 당에 오를 사람들은 저녁 식사 후 당주 집에 모여 마을의 현안 문제 등을 논의하다가 11시 30분쯤 제물을 지고 당으로 오른다. 노인들이 앞장을 서고 짐을 진 젊은이들이 뒤따른다. 당은 마을에서 15분 거리에 있다. 당에 오르는 길목에서 당까지는 미리 전기를 끌어다 밝혀 놓았고, 당주가 길을 정리해 놓았기 때문에 초승이라 하더라도 산에 오르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당에 오르면 준비해 놓은 장작으로 불을 지피고 고사 제사 준비를 한다. 먼저 작은 소반에 팥떡 한 덩이, 북어 한 마리, 숭어 한 마리, 부침 한 장과 약주 한 잔을 차려 촛불을 밝혀 놓고 아랫당에서 고사를 드린다. 아랫당은 웃당을 오르는 길목에 있어 거리제와 같은 성격을 갖는다. 실제로 이곳에선 아랫당고사를 거리 도당제라 불렀다. 아랫당고사는 당주가 절을 하고 술 한 잔 올리고 소지 축원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난다.
본격적인 고사는 웃당에서 이루어진다. 아랫당고사를 하는 동안 상을 차린다. 상차림은 약 15가지의 제물을 층층이 쌓아 올려 12반 상을 차린다. 제단 양 귀퉁이에 촛불을 밝히고 창호지를 깐다. 그 위에 아무런 제기를 사용하지 않고 나머지 제물을 겹겹이 쌓아 올려 12뭉치를 만든다. 팥떡을 두 켜 놓고, 그 위에 녹두 부침, 두부 부침, 다시마 튀김, 찹쌀 부침, 소고기 산적 등을 차례로 한 켜씩 올리고, 층층이 쌓아진 덩어리 사이사이에 북어와 숭어구이 12마리를 끼어 놓는다. 다음에 밤, 대추, 사과, 감 등의 과실과 약과, 산자를 주위에 쌓아 올린다. 그리고 술 두 잔, 메(밥) 두 그릇, 국 두 그릇, 다시마를 넣은 소탕(소고깃국)과 무나물을 중앙에 차린다.
상차림이 끝나면 잔을 올리고 당주가 절을 하고 다시 잔을 올리고 축관이 축을 읽고 나면 당주가 세 번의 절과 잔을 올린다. 이 절차가 끝나면 축을 소지한다. 이때 덕담을 하는데, 주로 “마을 근심 없애고 마을 태평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면 통장과 노인이 “당주 애썼으니 굽어 살피소서”라고 덧붙인다. 축 소지가 끝나면 참여한 사람들이 차례로 절을 하고 사고지를 소지하며 축원한다. 이때는 각자의 소원을 빈다. 당주의 음복으로 고사를 끝낸다.
# 음복과 현안논의
제의가 끝나면 모두 당주 집으로 가서 미리 준비한 소 내장탕으로 술상을 차려 음복을 한다. 거의 새벽 2시경에 이른 시간이다. 이때 결산보고를 하고 아직 해결하지 못한 마을의 현안 문제를 계속 의논한다. 또한, 당주 및 수고한 사람들을 격려하며 마을의 화목과 친선의 자리가 되도록 한다. 제의에 참석하지 못한 노인을 위해서 제물을 따로 챙겨 드리고, 다음날 아침에 당주 집에 모셔서 음식을 대접한다.
주민들은 동네가 평안하려면 ‘도당을 위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6·25전쟁 당시 70여 명의 마을 청년들이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청년들은 입대 전에 마을 어른의 충고대로 도당에 올라 인사를 드렸다. 이들은 전쟁 후 모두 무사히 돌아왔다. 당시 이 마을 출신 중에서 2명의 전사자가 있었는데, 이 두 명은 6·25전쟁 전에 입대했던 자들로 도당에 인사를 드리지 않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청년들이 무사히 귀환한 것은 도당신 덕분이라 생각하고 이후로는 입대할 때 도당에 인사를 드리는 것이 이 마을의 관례가 되기도 했다.
山祭祝
維歲次 丙子 二月 辛酉 朔初三日 丁巳 ㅇㅇㅇ
敢昭告于 山靈之神 今以洞民 一同 玆値上旬 擇日祭奠 謹以酒脯醯 魚肉餠靑
牲幣奠獻 神其保佑 祈願 父慈子孝 夫和婦順 壽命長壽 富貴功名 子孫滿堂 憂患逐滅
五穀豊登 牧畜繁殖 ?害防止 家和萬事 敢願成就 伏惟 奠影勿嫌 少誠下鑑 尙饗
(감히 산령지신에게 밝게 고하니 지금 우리 동민 일동은 성대히 차려 놓고 상순에 날을 잡아, 삼가 술, 포, 젓, 물고기, 고기, 떡, 희생(통째로 제사에 쓰이는 소), 폐백을 올려 감사드리나이다. 기원컨대, 아버지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도하며, 지아비는 온화하고, 지어미는 순정하게 해 주시고, 수명을 장수하게 하고, 부귀공명과 자손이 집에 번성하며, 우환을 쫓아 없애주시고, 오곡을 풍족하게 하며, 목축을 번식하고, 재해를 방지하고, 집안의 모든 일이 화목하며, 감히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도와주소서, 정성 적다고 싫어하지 마시고 오셔서 자리 잡아 드시옵소서.)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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