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동제(5) - 동제 규약 -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11-22 22:24:30
인천의 동제(5) - 동제 규약 -
문상범(제물포고등학교 교사)
인천시 옹진군 영흥도의 버드니 마을, 계양구 서운동과 목상동, 서구 검암동에는 동제와 관련한 중요한 기록이 전해 온다. 주로 제사 비용을 마련하고 사용한 내용의 기록이다. 제의 때마다 각기 다른 기록자가 편리한 대로 간단히 적어 놓았고, 중간에 기록되지 않은 해도 있지만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이 지역의 제의가 어떤 모습으로 변천됐는지를 자세히 살필 수 있고, 당시의 상황을 가늠할 수 있다.
# 영흥도 버드니 마을의 당계좌목
영흥도의 버드니에는 당고사의 여러 가지 규칙을 제정하고 이를 지키기로 한 당계좌목(堂契座目)이라는 문서가 전해 온다. 이 좌목은 당고사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에 큰 구실을 해 왔던 것으로 일상생활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버드니에서 당고사를 정성껏 바쳐 온 데에는 당계좌목이 큰 도움이 됐다. 당계좌목은 절목(節目)과 당고사 비용 모금의 두 부분으로 돼 있다.
절목은 다음과 같이 4개 항목으로 돼 있다.
1. 공회일(公會日)은 매년 시월 그믐날로 정한다.
2. 고사날은 해마다 섣달 그믐날로 정한다.
3. 고사인(告事人, 공원)은 공회일에 두 사람을 뽑았다가 12월 20일이 지나서 가장 깨끗한 이를 정해 맡도록 한다.
4. 고사에 이유 없이 불참하는 사람은 벌금 30전을 물리며, 이 돈은 공회의 경비에 보탠다.
다음에 마을 질서와 관련한 16개 항목의 세부 규칙을 적어두었다. 기록이 훼손돼 일부 내용은 정확하지 않지만 그 내용이 음미해 볼 만 해 몇 조항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4. 소나무를 베거나 남의 땅의 나무를 베어 훔쳐 가는 자는 즉시 관에 알린다.
6. 만약 스스로 그 잘못을 반성하는 자는 매 50대를 친 뒤에 두 냥의 벌금을 물려서 고사 경비에 보탠다.
7. 술에 취해서 어지러운 행동을 하는 자는 매 50대를 치며 -하략-
9. 저포(樗蒲)와 척사(擲柶)놀이를 하거나 이를 주선하는 자는 매 30대를 치고, 벌금 두 냥을 물린다. 만약 이를 거역하는 자는 모두 사유를 적어서 관에 알리고 집을 헐고 마을에서 쫓아낸다.
10 규칙을 어긴 자와 이해 관계에 얽혀서 고발을 못한 자는 가장 큰 벌을 내리고, 적발된 자도 가장 큰 벌을 내리고, 이를 적발하는 사람은 중간 상(中賞)을 받는다.
11. 무릇 평상시에 규율을 어긴 자를 찾아서 알리는 사람은 최고의 상을 받는다.
12. 젊은이로 어른을 모욕한 자는 매 50대를 치고 만약 패륜의 악행을 저지르면 곧 관에 알린다.
13. 늙어서 규정대로 벌을 내리기 어려울 때에는 매 한 대를 치고 벌금도 한 푼만 받는다.
16. 벌금한 냥(돈)은 매달 초 네 번씩 공회일에 낸다.
<상벌(上罰)은 매 50대, 중벌(中罰)은 매 30대, 하벌(下罰)은 매 20대, 큰상(上賞)은 5전, 가운데상(中賞)은 3전, 작은상(下賞)은 2전>
이 뒤부터는 해마다 당고사를 위해 성금이나 성미(誠米)를 낸 사람과 액수나 양을 적은 물목이 이어진다. 1996년 내용을 뽑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참가 호수는 26호로 세 집이 늘어났으며 제비 모금 총액은 42만 원이다. 가장 많은 액수인 3만 원을 낸 집이 네 집이고 1만 원을 낸 집은 열 집이다. 그리고 제일 적은 액수는 5천 원(한 집)으로 집마다 자기 형편에 따라 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이 밖에 현금 외에 성미도 닷 말이 들어왔으며 한 말은 시루떡을 찌는데, 나머지는 주식대(酒食代)로 썼다. 고사에 든 비용은 모두 8만 원이며 대동계에 15만 원이 나갔다. 이들 항목 가운데 공원(公員, 고사 때 제주 구실을 하는 이) 한 사람과 소염(所任, 제주를 돕는 이) 둘에게 7만5천 원을 들여 내의를 사주었다는 대목은 매우 주목된다. 이것은 추운 겨울에 찬물에 목욕해 가며 고사를 지내야 하는 이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지만, 고사를 이끌어 가는 일이 ‘힘들고 번거롭다’라는 인식이 점점 퍼져서 이 일을 맡은 이에게 ‘성의 표시’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인식에까지 이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제수로는 닭과 북어 각 한 마리에 사과와 배 3개씩, 대추와 밤 1홉씩, 다시마 한 묶음, 산자 한 접시, 소지 종이 한 묶음, 양초 한 갑을 마련했다.
이 좌목이 당고사뿐 아니라 마을사람들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에 큰 구실을 해 왔던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좌목은 곧 일상생활에 대한 행동 규범이기도 했던 것이다. 특히 돈내기 윷놀이를 벌이면 ‘집을 헐고 마을에서 쫓아낸다.’라는 대목을 보면 이 규범이 얼마나 엄중한 것이었던가를 알려 주는 보기이기도 하다.
# 서운동의 산제(山祭)
서운동에서는 1989년까지 산제가 행해졌다. 이곳에는 산제를 치르며 이에 관한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는 ‘동운정 산제 행사기(東雲町 山祭行祀紀)’라는 기록을 남겨 놓았다.
이 행사기는 1945년부터 1989년(1979년부터 1988년까지 기록되지 않았다.)까지의 산제에 대한 중요 사항을 담았다. 수입 부분인 백미 수납기(白米 收納記)와 지출 부분인 제물기(祭物記)로 돼 있다. 수납기에는 산제에 사용될 비용을 어떻게 마련했는지를 기록했고, 제물기에는 제수 물목 및 기타 비용의 사용에 대해 기록했다. 그리고 매해 앞부분이나 뒷부분에 당주와 제관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
기록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간단한 내용이지만, 행사기의 내용으로 서운동의 동제가 어떤 모습으로 변천됐는지를 자세히 살필 수 있다. 우선 제사 비용 마련과 참여 주민의 범위와 참여 방법 등을 알 수 있다. 제사 비용은 매년 전 가구에게 한 되의 쌀이나 그에 해당하는 돈을 걷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 책임은 각 반장에 있었고 대체로 반별로 한두 가구를 제외하고는 모든 가구가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수납된 쌀의 사용 용도와 처리 방법, 당시의 쌀값 시세와 제물 가격의 변동 등 경제적인 면도 함께 살필 수 있다.
목상동에는 산제 전후에 작성한 제사 비용 추렴과 제물 구매에 관한 ‘산신제 경비부’라는 기록과 제의절차와 제수 물목 내용을 기록한 문서가 있다. 산신제 경비부는 1961년부터 작성됐고 중간에 몇해의 기록이 빠져 있다. 마을 사정으로 제의를 치르지 못한 까닭이다.
제비의 마련은 가정마다 똑같이 일정량의 곡식과 쌀을 걷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가정 형편에 따라 더 내거나 덜 내기도 한다. 제물은 따로 작성된 ‘제수 물목’의 내용대로 준비하며 그 해의 물가 수준을 고려해 각 제물의 예상 가격을 산정해 제의 비용을 산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밖에 검암동에도 축문, 진설도, 제수물목 등의 내용을 적은 문서들을 묶어 놓은 것이 있다.
<※ 자료제공=인천역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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