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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생음악·문학 나누던 '시랑'의 추억

by 형과니 2023. 5. 17.

생음악·문학 나누던 '시랑'의 추억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12-03 11:23:06

 

생음악·문학 나누던 '시랑'의 추억

흐르고싶은인천-길에서 묻다 흔적들 21

 

팔팔로, 우측의 인천여상. 인천신사가 있었던 터

 

신포동 소()사거리 '시랑'(詩郞). 문화인의 사랑방이었다.

1981년 문 연 문화사랑방 촌로·젊은 예술가 발길 줄이어

 

 

눈으로 가고 발()로 보고 가는 길은 누군가와 함께 가는 것이 더 좋을 수 밖에 없다. 그가 보는 것을 나는 볼 수 없지만 그가 가는 곳은 나도 갈 수 있는 사실, 방심을 허락하지 않는 정확한 시대의 언어가 살아 있어 공존의 길이 된다.

 

바로 역사가 만들어 낸 시대풍의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어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개항장 일대의 해방 공간과 그 이전 침탈과 수모의 역사가 올곧이 새겨있기 때문에 박물관 뿐만이 아니라 소극장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인천 문화역사의 심장인 개항장은 관광문화 지역으로 큰 성과로 이루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아픈 문화가 도시를 감싸고 흐르고 있어 존재의 가치는 영원한 것이다.

 

길은 길대로 있으며 길 옆으로 늘어선 시대의 구축물들은 그리움을 일깨우며 가르쳐 주지 않아도 찾아가는 안내자이며, 마음의 유폐(幽閉)를 견디며 지낼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는 이유는 그리움을 알고 일깨울 답을 주는 길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way)은 출발점과 도착점이 이르는 방법과 과정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래 길은 모든 사람이 가며 희망과 장래가 있는 정신적 길로도 곧잘 표현되는 것 허나, 죽어지며 비명횡사할 일은 아닌가 싶다. 객사라 하여 집안에 들이기를 꺼려 했던 옛 풍습, 이것이 길의 슬픔이라면 슬픔이구나.

 

팔팔로(팔판루, 수명루와 명월루를 합친 일본 요정을 그렇게 말했음. 1889년도)에 있는 정원 목욕탕을 애용하는 남곡 선생의 동행을 뿌리치지 못한 촌로들의 초 저녁은 목욕을 하는 시간이었다.

 

퇴근시간에 맞추어 만남의 장소로 가야하는 필자에 비하여 시간이 넉넉한 촌로들의 일상중 산책, 한잔술 그리고 귀가의 역순으로 따지면 4번째로 꼭 해야만 되는 목욕은 괴벽에 가까운 중독현상 이기도 하다. 저마다 말없음 표를 찍고 따로 하는 목욕탕의 모습은 우습기까지 했었다.

 

시랑(詩郞), 시의 집이다.

 

81년초에 시인 채성병이 개업한 신포동 4거리 2층은 항상 붐볐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문인들, 인천의 예술인들, 지금 생각하면 무엇한다고 하는 사람치고 시랑의 문지방 안 넘어 본 사람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문화 사랑방이었다. 그 뿐이 아니라 음악(고전, 클래식)에 깊은 조예가 있는 사람들이 더 애호하던 공간으로 인천 연극을 이야기 할 때의 대명사 '돌체'라면 이 시랑은 음악감상이며 문학 마니아들의 대명사처럼 여겨 졌던 곳이다.

 

생 음악이 있고 좁은 공간일 망정 가끔씩 젊은 시인들의 시 낭송회가 열리며, 젊은 화가들의 작품이 벽면을 장식, 변화하는 인천의 모습이 나타나던 곳이다. 촌로들과의 만남의 장소는 바로 이곳, 산책길에 들리는 시랑이야말로 피로를 풀며 와인까지도 즐길 수 있었던 81년 초의 예촌이다.

 

거나하게 즐긴 술 덕분에 이어지는 흥, 촌로들의 몸짓은 춤이라기엔 좀 어설픈 모습이었지만 이곳이 아니었음 보기 힘든 연기(?) 아니었나 싶다.

 

제일 연장자였던 촌로들의 퍼포먼스가 있는 날이면 모두 즐거워했던 기억, 다시 볼 수 없는 옛날은 전설 같구나.

 

촌로들을 비롯하여 정순일, 정순창, 문인으로 손설향, 김구연, 김윤식, 조우성, 김학균, 최무영 등 그리고 막 태동되던 문학동인회 회원들, 화가들.

 

임대료와 대형화된 유흥 소비경제에 밀려 문을 닫게 된 시랑은 3년의 짧은 흔적으로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다.

 

시랑이 개업한지 두 달 무렵(81420) 제주출신의 서예 소강 부달선(小岡 夫達善) 선생의 한시(漢詩)집을 발간, 몇몇 지인들과 축하의 말씀전하며 즐겼던 추억의 장면이 그 시랑속에 갇혀 있었었구나. 꺼내어 보자. 일본의 상업학교를 5년 중퇴하고 24세때 인천에서 정착한 소강 선생은 신생동 5거리(, 금파건물)에 서실을 운영하며 후학을 지도했던 인천 지킴이 예술가 였었다. 현재 살아 계신다면 88, 늦은 나이 42세에 붓을 들기 시작하여 62년 첫 국전에 입선 한 후 7년을 한번도 거르지 않고 연 입선의 저력을 보인 소강은 '주간인천' 편집에도 관여하며 인천을 제2의 고향으로 알고 절차탁마, 경기도전 초대작가이자 심사위원의 해적이를 가지고 있었으며 개인전 6회의 저력을 과시한 작가였다.

 

해방직후 제주반란 사건을 호되게 겪고 고향을 떠나 전전 인천에 정착이후 안정된 삶을 살았던 소강은 인천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작가로 검여를 존경했으며 동정을 동행의 예술가로 흠모한 작가정신이 잘 그려진 '소강한시선집' 속에 칠언절구의 시로 잘 나타나 있다.

 

1982150시로 해제된 통금과 더불어 끝 없이 이어진 시랑(詩郞)의 사랑은 25시까지 이어졌다.

 

/김학균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