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인천에 큰불 -4백 채 잿더미
仁川愛/인천이야기
2009-01-15 23: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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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인천에 큰불 4백 채 잿더미
글·조우성 시인·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
불의 역사는 아득한 신화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에서는 프로메테우스가 감히 신이 애지중지하는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다. 그 죄로 그는 쇠사슬에 묶인 채 카프카스 산에서 밤마다 독수리에게 간을 뜯기는 무서운 형벌을 받는다. 애초에 불이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 신화에서는 불이 사람의 창조물이 된다. 단군의 셋째 아들인 부소(夫蘇)가 세상에 해충과 병이 나돌아 목숨을 잃는 자가 속출하자, 부싯돌을 만들고 그것으로써 불을 일으켜 태워 역병들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불이 신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물이라는 것은 대단한 혁명적 사고로 보인다.
하지만 그 같은 시각 차에도 불구하고, 불이 세상을 정화하고, 되살려 주는 힘이 있다고 믿었던 것은 동서가 다를 바 없었다. 참성단에서 성화(星火)를 채화해 전국체전 기간 내내 불을 밝히고, 시골에서는 지금도 집집마다 부엌을 관장하는 ‘조왕신( 王神)’을 모시는 것은 바로 그 신성성(神聖性)을 받아들인 풍속인 것이다.
불을 숭상하는 풍속은 도시에도 그대로 살아 있다. 이삿집에 가 성냥을 선물로 건네주며 ‘불처럼 일어나라’고 기원하는가 하면, 연탄불만은 그 전 집의 것을 살려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불을 두고 떠나오는 것은 곧 복을 버리는 행위라고 유추한 데서 비롯한 일종의 금기(禁忌)였다.
그렇듯 온 집안이 삼가며 소중히 다루어 온 불이건만, 단 한 번이라도 방심해 돌보지 않으면 불은 순간 무서운 화귀(火鬼)로 돌변한다. 그 화귀를 막기 위한 노력은 예부터 있었겠지만, 세종 때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한 것을 효시로 친다.
당시에는 궁궐, 관가, 민가 등에 불이 나면 온 백성이 다함께 불끄기에 나섰는데, 구화(救火) 기구가 쇠갈고리, 불채, 도끼, 물양동이, 불덮개, 저수기 등에 지나지 않아 진화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전한다.
근대적 소방 기구가 등장한 것은 그 한참 뒤인 개화기 이후였다. 1884년, 인천에 ‘소방조(消防組)’가 설치되고, 1896년 그것이 ‘공설 소방단(公設消防團)’으로 발전하면서 장정들이 펌프질을 해 물을 뿜던 ‘수총기(水銃機)’보다는 개량된 기기가 선을 보였지만, 아직 대화재에는 속수무책이었다.
1907년에 일어났던 대화재 때 그랬다. 3월 5일, 중구 신생동에서 불이 났는데, 불이 번져 무려 400채나 불태웠다. 그후 10월 19일 각국 거류지에서 19채가 전소되는 등 한 해에 7차례나 불이 나 모두 587채의 집이 소실돼 인천은 큰 공황 상태에 빠졌었다.
그 3년 뒤, 또다시 중구 사동에 큰불이 나 60채를 전소시키자 전 부민(府民)은 절망과 공포에 몸을 떨어야 했고, 인천부는 민심 수습 차원에서 부랴부랴 소방 시설을 대폭 보강해 저수지 설치, 증기 펌프 구입, 망루 건설, 상비대기소 설치 등을 했다.
그러나 조선인 부락에는 그때까지 아무런 소방 시설도 없었다. 이를 개선하고자 1913년 9월 정치국, 정영화, 장내흥, 서상빈 등 4명의 유지가 약 420원을 각출해 중구 경동에 상비파견소를 신설하고 소방수와 기구를 배치했다.
현대적인 소방(消防) 활동이 비로소 시작된 것은 미 군정기인 1947년부터였다. ‘인천상비소방조’가 ‘인천소방서’로 명칭이 바뀌었고, 미국으로부터 기증받은 신식 소방차 15대를 갖추면서 인천의 화마들과 본격적으로 맞써 싸웠던 것이다.
추운 겨울밤, 싸이렌 소리를 울리며 불자동차가 시가지를 질주할 때면, 가슴부터 철렁 내려앉았다. 누구네 집일까? 사람들은 무사할까? 어린 마음에 걱정을 하면서도 차 뒷난간을 힘껏 부여잡고 출동하는 ‘소방수 아저씨’들의 결연한 모습에서 큰 위안을 받았다.
그러나 이따금 가서 본 ‘불 구경’의 현장은 사투(死鬪) 그것이었다. 울부짖는 가족들, 시커먼 연기와 치솟는 불길, 그 속을 넘나드는 소방관들, 탄식하는 구경꾼 들이 빚어내는 그 아비규환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것은 1999년 10월 30일 밤에 일어난 ‘인현동 상가 화재 사건’이었다. 소방관들은 불과 23분만에 불길을 잡았으나, 사망 57명, 중경상이 80여 명이었는데다가 그 대부분이 꽃같은 나이였던 사상 최악의 참사였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 그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이번에는 경기도 이천의 한 냉동 창고에서 일순간에 40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해 또다시 많은 이들을 울렸다. 모두가 돈벌이에 급급한 세태와 소방 의식의 희박 때문이 아닌가 싶다.
불은 밝고, 따듯하다. 그러나 두려운 힘을 가진 존재다. 조심해 다루지 않으면 언제든 우리를 저 프로메테우스에 버금가는 고통의 사슬로 묶어놓을 것이니, 교만과 허욕을 버리고 겸허하게 다루어야겠다. 또한 우리를 대신해 목숨을 바쳐가며 불과 싸워온 인천소방본부 대원 여러분의 노고에도 사의를 표해야겠다.
세창 바늘 이야기
1백여 년 전, 조선 순조 때 ‘유씨(兪氏) 부인’이 쓴 명문 수필에 ‘조침문(弔針文)’이 있다. 그 내용 중, 일부를 가려 옮기면 이렇다.
“부녀의 손 가운데 종요로운 것이 바늘이로다. 연전에 시삼촌께옵서 북경(北京) 바늘 여러 쌈을 주시거늘, 무수히 잃고 부러뜨렸으되, 오직 너를 택해 해포가 되었더니, 슬프다, 가산이 빈궁하여 침선(針線)에 마음을 붙여 살았는데, 오늘 너를 영결하니, 오호! 통재(痛哉)라,”
부녀들에게 바늘이‘요긴한 물건’이었던 것은 연암의 소설 ‘허생전’ 등에 묘사된 바와 같다. 허생의 처도 삯바느질로 호구(糊口)했던 것처럼 바느질은 부녀의 숙명과도 같은 노역이었다. 그러나 개화기 때도 힘없이 툭툭 부러져 무던히 속을 썩였던 것 같다.
그 때, ‘히트 상품’으로 등장한 게 ‘세창 바늘’이었다. 인천에 있던 독일의 무역회사 세창양행(世昌洋行)이 야금 기술이 뛰어난 자국산 바늘을 들여온 것인데, 젖 뗄 때 썼던 ‘금계랍(키니네)’과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세창’의 명성은 그대로 이어져 60년대까지 중구 송림동에는 ‘바늘공장’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무상한 것. 바느질로 밝히던 밤들은 가물거리는 추억이 됐고, 어느덧 ‘세창 바늘’은 골동이 되어 박물관 진열장 속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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