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의 시발지 부평
仁川愛/인천이야기
2009-01-15 22:52:11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의 시발지 부평
글·조우성 (시인ㆍ인천시 시사편찬위원)
개항 직후 인천에는 청국인과 일본인 그리고 파란 눈의 상인, 종교인, 외교관, 군인들로 제법 흥성거렸다. 그러나 아직 경인선 철도가 놓이기 전이어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여행객들은 대개 하룻밤을 묵어야 했다.
서울에 도착하려면 족히 한나절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보다 먼저 인천에 신식 숙박업소가 생겼는데, 그 중 가장 이름난 곳이 ‘대불(大佛)호텔’이었다. 이 양식 호텔은 음식 솜씨가 좋고, 종업원들이 영어를 곧잘 해 외국인이 선호했다고 한다.
당시 서울까지 가는 방법은 세 가지였다, 걷거나 가마를 타거나 말을 빌리는 것이었다. 1895년 무렵의 기록에 따르면 1일 경인간 왕래인은 평균 3백여 명이었고, 말은 왕복 3원 50전, 가마는 8원이었다. 쌀 한 되가 25전이었던 때였다.
그 후 1903년 고종 황제의 어차(御車)가 인천으로 수입되었고, 24년 뒤인 1919년 자동차회사가 등장했다. 일본인들이 ‘별부자동차부(別府)’란 이름으로 택시 영업을 시작했는데 자동차가 점점 늘자 1921년에는 인천부에서 좌측통행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경인간을 버스가 정기적으로 달리기 시작한 것은 1929년 5월이었다. 경인버스(주)가 하루에 세 번 운행했는데 편도 70전에 소요 시간이 2시간이나 됐다. 기차보다 요금도 비싸고 시간도 더 걸려 별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이렇듯 인천의 신식 ‘탈것’에 관한 이야기는 일인들에 의한 것이었다. 자동차 생산도 마찬가지였다. ‘대동아 공영’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혔던 그들은 1937년 부평구 산곡동에 ‘국산자동차(주)’를 설립해 군용차를 처음 만들었다. 더불어 주목해야 할 것은 ‘인천육군조병창(仁川陸軍造兵廠)’이다.
일본은 대륙 침탈을 수행하기 위해 1923년 토쿄, 오사카 등 5개소에 조병창을 차렸고, 남만주(1938년)와 인천(1940년)에도 각각 해외 조병창을 두어 소총, 탄약, 대포, 수류탄, 군도, 화염방사기를 비롯해 소형 잠수함과 경장갑차를 생산했다. 당시 많은 이들이 끌려와 노역을 당했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자동차 제조에 대한 사상 최초의 경험 축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식민 제국주의의 그늘에서 곁눈질한 것밖에는 안 됐다. 일본이 패망해 이 땅에서 퇴각한 후에도 우리 손으로 자동차를 만들 엄두를 못 냈던 것은 그 기술의 수준이 초보적인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우리 손으로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광복 직후의 혼란기와 사상 최악의 상잔인 6·25전쟁이 끝난 뒤인 1955년 서울의 최무성 씨 3형제가 미군에게 불하받은 지프를 개조해 ‘시발자동차’를 만들었다
그러나 오늘의 시각에서 본다면 또다른 차원의 자동차 이야기다. 자동차 산업의 핵은 무엇보다도 성능 좋은 엔진 개발에 있지만, 시발은 지프 엔진을 그대로 장착하고 거기에 외형만 만들어 얹은 짝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시발은 진정한 의미의 신차 개발이라고는 볼 수 없는 과도기적 산물이었다.
초창기에는 차 한 대 만드는데 4개월이 걸리고 값도 8만환이나 해 사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산업박람회 출품을 계기로 일반에 알려지면서 그의 천막 공장은 고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가격도 하루아침에 30만환으로 뛰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투기까지 일어나 상류층 부녀자들 사이에 ‘시발계(始發契)’까지 성행했지만 자동차가 갑자기 늘자 석유 파동을 우려한 당시 이승만 정부가 1957년 자동차 수를 제한하는 긴급조치를 발동하였다, 그에 따라 시발은 큰 타격을 입었고, 5·16 이후 정부 보조금까지 끊기자 1963년 5월 누적 대수 2천2백35대로 단종하고 말았다.
우리나라 최초로 현대적 생산 공정과 기술로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한 곳은 역시 인천(仁川)이었다. 재일동포 박노정 씨가 1962년 부평에 새나라자동차를 설립하고 일본의 닛산 블루버드를 전량 반제품으로 수입해 새나라 자동차라는 이름으로 조립해 판매하면서부였다.
그러나 이 화사는 외화 사정이 악화되면서 중간재 부품을 수입할 수 없게 되자 설립 1년 만에 생산을 중단했다. 새나라는 자동차의 대량 생산 시대를 열었다는 의의를 남긴 채 그 운영권을 신진자동자(주)로 넘겼다.
신진은 1964년 일본 토요다에서 들여온 부품을 조립해 ‘코로나’와 ‘크라운’을 선보였다. 1967년 종합자동차 제조 공장을 부지 50만 평에 짓기 시작해 그 중 연산 1만 5천 대 규모의 공장을 1968년부터 가동하면서 부평은 자동차 산업의 본거지로서의 체면을 세워나갔다.
그 무렵인 1967년 현대그룹은 정부의 규모화 정책에 따라 미국 포드와 손잡고 ‘코티나 승용차’를, 기아산업은 1974년 일본 마스다의 협력으로 ‘브리샤’를 각각 제조하였다. 그러다가 1972년 제휴사인 토요다가 철수하자 신진은 미국 GM과의 합작으로 GM코리아를 설립하였고, 1976년 사명을 새한자동차로 변경했다.
이로써 3각 체제를 이룬 국내 자동차 업계는 1978년까지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그 이듬해 몰아친 2차 석유 파동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고, 1980년 이른바 2·28조치로 승용차는 새한과 현대로, 소형버스와 트럭은 기아가 생산토록 했다.
1983년에 이르러 수출 증대와 경기 회복이 힙 입어 대우그룹이 새한을 인수해 자동차 산업에 진출했다. 대우, 현대, 기아의 신 3각 체제는 1994년 삼성그룹이 승용차 산업에 뛰어들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등 또 한 차례 복병이 나타나면서 자동차업계에는 대변혁이 일어난다,
1997년 기아의 부도를 시작으로 대우, 삼성도 잇따라 퇴출되었다. 그 가운데 대우는 2002년 미국 GM자동차에 매각돼 사명을 GM대우로 바꾸었다. 대우자동차와 GM자동차 간의 합작 관계가 10년도 안 돼 경영권을 송두리째 GM으로 넘겼던 것이다.
이로써 국내 자동차 산업계는 토종 1개 사(현대)와 외국계 2개 사(GM대우, 삼성 르노)가 맞서는 트로이카 체제가 되었고, 국내 자동차 산업의 본거지였던 인천은 옛 영화를 되씹는 신세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GM대우가 인천 지역 경제에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21%에 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니 GM대우의 사활에 지역사회의 흥패가 달려 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GM대우의 인천 근무 인원만 1만3천6백54명, 1차 협력업체 인원도 1만4천5백명에 이르며 2007년 기준 인천 수출 총액의 51.0%를 차지하고 있었다니 재삼 주목할 일이다.
지역과 기업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다. 기업이 번성해야 지역 경제가 돌아가게 되고, 지역사회가 보듬어 안아야 기업이 세상의 거친 풍파를 헤쳐 나갈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기축년은 인천 지역사회와 GM대우의 사랑나누기로 경제 한파(寒波)를 이겨내는 훈훈한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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