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도 최초, 초등 신교육도 최초
仁川愛/인천이야기
2009-01-15 23: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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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도 최초, 초등 신교육도 최초
새 학기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입학식을 한 어린이, 꿈 많은 중학생, 대입 전선에 나선 고3, 취업 준비에 여념이 없을 대학생, 모두 등교길 발걸음이 싱그럽기만 하다. 바야흐로 인천의 수백여 학교들은 기지개를 펴고, 학생들은 힘차고 보람있는 내일을 꿈꾸고 있다. 30여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쾌적한 교육 환경과 최첨단의 시설 등은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대변혁을 느끼게 한다. 그럴수록 그 옛날 인천의 학교는 어떠했을까 궁금해지는 것도 인지상정이리라.
글·조우성 시인·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
학교의 원조는 향교와 서당
멀리 고려 시대 인천의 학교에는 관학인 향교와 사학인 서당이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서원(書院)이 생겨 향교와 함께 중등 교육을 담당했다. 이들은 성현에 대한 제사와 교육 등을 담당해 지역 문화에 크게 기여하였고, 마을마다 들어선 서당은 반상(班常)을 가리지 않고 초등 교육을 담당하였다.
향교는 지금도 교동·인천·부평·강화 등 4곳에 남아 있다. 그 중 고려 때(1127년) 세워진 교동향교는 우리나라 최초인 것으로 알려졌고, 강화·부평향교도 거의 같은 무렵에 건립되었으며, 인천향교 역시 토지와 전적, 노비 등을 국가로부터 지급받아 30명의 교생을 가르쳤다고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인천 교육의 뿌리가 면면함을 알 수 있다.
학산서원, 아쉽게 훼철돼
백운동서원 이후 전국에 세워진 서원은 청년자제들이 학덕을 연마하는 사립 교육 기관으로 국가에서도 장려했다. 인천에는 문학의 학산서원(鶴山書院)과 강화의 충렬사(忠烈祠)가 있었다. 그러나 고종 8년(1871) 서원 철폐 정책에 따라 전국 679개소 가운데 47개만 남기고 폐지했는데, 이때 학산서원도 훼철됐다.
천자문, 동몽선습 등을 배웠던 서당은 조선 시대에 더욱 번성하였다. 개화기를 거쳐 일제 강점기까지 존속해 민족 교육의 산실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17년 경기도 내에는 2,463개소의 서당이 있었으나 ‘서당규칙’ 공포 이후 점점 줄어 1932년 인천에는 7개소만 남았던 것으로 전한다.
영화학당, 신교육을 시작하다
1883년의 인천 개항은 교육에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1885년 4월 5일 인천에 도착한 아펜젤러 목사 부부는 내리교회 창립의 기반을 닦았고, 제2대 목사인 존스와 그의 부인은 1892년 교회 안에서 남자 3명, 여자 2명을 모아 신교육을 시작했다. 이들은 1894년 건물을 6칸으로 늘리는 한편 학교 이름을 ‘영화학당(永化學堂)’이라 짓고, 남학생 50명, 여학생 20명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인천은 물론 우리나라 최초로 문을 연 서구식 초등 교육기관이었다.
영화학당 학생들은 단발머리에 흑색 교복을 입는 등 개화에 앞장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는데 후에는 미국에서 기증받은 나팔, 북, 소총 등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해 이름을 날렸다. 학동들의 제식 훈련 모습은 당시 인천의 큰 자랑거리였다.
최초의 관립학교는 외국어학교
그 무렵, 김홍집 내각이 갑오경장을 단행하고, 이듬해 고종 황제는 교육에 관한 조서(詔書)를 내렸다. 황제는 신교육을 강조하였고, 교육이 국가 중흥의 강력한 힘이 될 것을 역설하였다. 그같은 교육입국의 정신에 따라 근대식 학교의 법규와 규칙이 제정, 공포되었으며, 그에 따라 인천에서도 학교가 속속 설립되었다.
인천 최초의 관립 학교는 외국어(外國語) 학교였다. 개항 이후 외국과의 교류에 필수적인 외국어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학부아문(지금의 교육부)이 1895년 6월 인천감리서 안에 직접 세웠다. 정식 명칭은 ‘관립외국어학교 인천지교’였다.
초창기의 수업 연한은 3년이었고, 영어과와 일어과가 있었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영어과를 폐지했고, 1904년 4월에는 학교명을 관립인천일어학교라 했다. 이 학교는 뒤에 인천상업학교로 전국에 명성을 떨쳤고, 광복 후에는 인천고등학교(仁川高等學校)로 개칭했다. 1995년 개교 100주년을 맞아 거시적인 기념 축제를 가져 많은 이들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현재 ‘송도국제도시’에 개교 예정인 국제학교와 커리큐럼이 유사한 학교를 이미 한 세기 전에 설립했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사학, 제녕학교가 처음 열어
순수 민간 사립학교로 처음 문을 연 곳은 ‘제녕학교(濟寧學校)’였다. 인천신상협회의 서상빈(徐相彬) 사장이 세워 인천항에서 활동할 수 있는 일꾼을 기르고자 신학문과 영어를 가르쳤다. 설립 당시 자금이 부족해 제물포해전 때 자폭한 바략 호를 인양해 거금을 쥔 김정곤(金貞坤) 씨의 도움을 받았다고 전한다.
주간에는 일반 신학문, 야간에는 영어를 가르쳤는데, 서병희(徐丙熙), 서병협(徐丙協), 장면(張勉) 국무총리의 아버지 장기빈(張箕彬) 씨와 인천해관 직원 강준(姜準) 씨 등이 교사였다. 그러나 제녕학교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알려지지 않고, 그 명맥도 계승하지 못해 인천 학교사의 아쉬운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이들 세 학교를 소개한 것은 인천의 신교육 초창기에 그들이 감당했던 선구적 의미를 되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그 전통의 맥을 이어 후에 설립한 수많은 초·중·고·대학교들이 인천의 자제들을 기르고, 키워 이 나라 발전을 위해 헌신한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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