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외교의 1번지였던 제물포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8-29 11:5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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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외교의 1번지였던 제물포
개항 직후인 1884년 10월에 체결한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에 의해 일본, 청국, 영국, 러시아, 독일, 미국은 제물포에 자국인들을 거주하게 했고 특히 일본, 청국, 영국, 러시아는 인천에 영사관을 설치했다.
글·조우성 시인/인천시 시사편찬위원
일청영로(日淸英露), 영사관 세워
제물포가 개항된 것은 1883년이다. 그에 따라 지금의 남구 관교동에 있던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가 설치 5백여 년 만에 폐지되고, 대신 개항장으로 정해진 제물포-지금의 중구 내동-에 인천감리서(仁川監理署)라는 새로운 이름의 관청이 들어섰다.
인천감리서는 과거 도호부가 수행해 왔던 행정기능과 더불어 외국 선박의 입출항, 해관(海關·세관)의 운영, 외국인 관련 사무 등을 맡아 보았는데, 이와 같은 관아의 확장 이전은 인천 지역사 변천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근대(近代)와의 접촉이었다. 인천도호부 시절, 인천의 인구는 기천 명에 지나지 않았고, 주업은 농사였으며 향교와 서당이 유일한 교육기관으로서 기능하는 전통적인 농경사회의 틀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물포에서의 사회적 양상은 판이하게 달랐다. 우선 농사가 주업일 수 없었다. 개항 초 제물포의 사진을 보면, 탁포(拓浦·지금의 신포동) 해변가 일부 지역에 논이 있기는 했지만,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언덕바지(지금의 중구청 자리)에는 벌써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개항 직후인 1884년 10월 체결한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에 따라 일본은 제물포 포구 중앙 지대에 7천여 평을, 청국은 서쪽 해안 지대 5천평을, 영국, 러시아, 독일, 미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은 응봉산 기슭을 포함한 14만평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각국지계로 정해 자국민들을 거주하게 하였다.
더불어 청국은 오늘의 중산소학교, 일본은 중구청, 영국은 파라다이스 호텔, 러시아는 인천역 옆 해안가에 각각 영사관을 설치했다. 오늘날 인천에 단 한 곳의 외국 영사관도 없는 현실과 비교하면 당시 제물포가 국가 외교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그 같은 제물포의 지정적 중요성은 외국인의 러쉬로 이어졌다. 외교관, 상인, 선교사, 군인, 학자, 여행가 등 제물포를 찾은 그들의 계층은 다양했다. 특히 개항 초 청국 지계 안에 자리잡은 동순태(同順泰)를 비롯한 청상(淸商)들이 광목, 옥양목, 설탕, 비누, 성냥, 비누 같은 개화 물품을 들여와 큰 수익을 내자 영국의 이화양행(怡和洋行·Jardine Matheson Co.), 독일의 세창양행(世昌洋行·H. C. E. Meyer Co.), 미국의 타운센트 양행(陀雲仙洋行·Townsend Co.) 등 서양의 무역상사들도 속속 발을 들여 놓았다.
그들을 국적별로 보면 일본, 청국, 영국, 러시아, 독일,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인 등이었다. 그들은 각기 제물포에 거주하면서 상호간의 이해 증진과 이권 조정에 관한 협의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일종의 자치 기구인 신동공사(紳董公司)를 출범시켰다.
신동공사는 회원국 간의 교류 기구로서 제물포구락부를 조직했다. 곧바로 지금의 중구 관동에 회관을 마련했으나 공간이 협소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자 러시아의 건축 기사 사바찐에게 설계를 맡겨 1901년 6월 22일, 지금의 자유공원 인천문화원연합회 자리에 제물포구락부의 회관 건물을 완공했다.
제물포구락부의 멤버들은 독일인 사업가 뤼어스, 통역관 우레탕, 러시아 설계가 사바찐, 동서개발회사 사장 데쉴러, 세창양행 지점장 볼터 등 인천 거주 외국인을 비롯한 미국 공사 알렌, 서울 전차 건설 책임자 콜브란, 궁정 악장(樂長) 에케르, 고종황제의 시의(侍醫) 분쉬 박사, 영국 영사 고페 등 국적을 망라했다.
독일 의사 분쉬가 자신의 일기에 “어제 제물포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볼터 씨와 함께 마이어 상사의 젊은 사장 뤼어스 라는 분한테 오찬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제물포구락부에 가서 이 곳 주요 인사를 모두 만나보았습니다. 영국 영사, 프랑스 세관장, 이 곳 큰 상사의 대리인 50여 명과 볼터 씨 가족을 만나러 서울서 온 두 명의 신사를 만났습니다.”고 회고한 내용은 바로 제물포구락부의 위상을 단적으로 전해 주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인천 제물포는 조선이 근대화돼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외교적 거점으로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의료 발전에 중재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러나 청일·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에 의해 국제정치의 판도가 급격히 바뀌면서 제물포는 ‘인천(仁川)’의 일본식 발음인 ‘진센(Jinsen)’으로 불렸고, 도시 전체가 일본의 소도시처럼 변모해 갔다.
외교적 거점으로서의 위상도 날이 갈수록 쇠잔해 갔다. 광복 전까지 일본, 청국인을 제외한 인천 거주 외국인은 선교사, 신부, 수녀 등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광복을 거쳐 6·25전쟁 후까지는 줄곧 월미도와 부평 등지에 주둔한 군인에 의한 G.I 문화에 젖어들었던 것이다.
개항 후 국제도시로 출발했던 인천의 또하나의 정체성이 최근 비로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대 공산권과의 국교 정상화, 인천항 전면 독(Dock) 건설 등 인천항의 활성화와 인천국제공항의 개항, ‘신도시’ 건설 등 도시 인프라의 지속적인 구축과 인천세계도시축전, 2014년 인천아시아경기대회 개최 등은 인천이 우리나라 외교의 1번지였던 위상을 되찾는 계기가 되리라 전망된다.
특히 한창 건설 중인 ‘신도시’는 국제 외교의 현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건설 과정 중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노증되고 있지만, 국제비즈니스센터, 지식정보산업단지, 첨단바이오단지, ‘테크 빌’ 등이 마침내 실현되는 날, 인천은 천지개벽에 비견할 사상초유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과학적 대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한 세기 전, 싫든 좋든 제물포를 개항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피동적 역사에 비하면, 오늘 국제도시로 거듭나는 인천의 위상에 우리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인천광역시 굿모닝 인천2008년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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