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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역사

근대화의 중심지 인천의 모습

by 형과니 2023. 5. 11.

근대화의 중심지 인천의 모습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7-20 11:03:23

 

개항 신문물 '홍수'속 격동하는 인천

상공업 중심지-통신체계의 급속 발전

<공동기획-‘우리문화유산 바로 알고 지키기’>

 

개항과 근대문화이야기 - 근대화의 중심지 인천의 모습 1/ 문상범

 

1883년 부산,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개항을 하게 된 인천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이루어진 것들이 여럿 있다. 개항으로 수많은 외래 문물이 도입되면서 인천의 모습이 바뀌어 갔고 새로운 일이 생겨나고 처음 보는 것들이 들어왔다.

 

최초의 상업 회사 설립

 

담배갑과 세창양행바늘

1883년 개항과 동시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인천에 상업회사가 세워졌다. 개항으로 자연스레 중국인, 일본인, 서양인들이 인천을 생활터전 삼아 활동했고, 가장 먼저 서양인들이 상업 회사를 만들어 상업 활동에 주력하게 된다. 이때 설립된 상업회사가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상업회사로 알려져 있다.

 

여러 상업회사 중에서 주목할 것은 1884년에 독일 마이어 양행이 개설한 세창양행 인천지점이다. 세창양행은 각종 생활필수품의 수입 판매업을 중심으로 은행업, 광산업, 해운업 등을 하였다. 세창양행이 수입 판매한 것은 바늘, 염료, 바이엘 약품 등 이었는데, 당시에 바늘과 같은 서양 물품들이 유행처럼 번져나가며 세창양행은 그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세창양행에서는 회사 설립을 위해 독일 함부르크에서 온 세명의 상사원의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금의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자리에 사택을 지었는데, 이 건물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주택으로 알려져 있다. 이 건물은 건평 173.15평으로 일부만 2층으로 된 벽돌집으로, 바깥벽에는 회칠을 하고 지붕에는 붉은 기와를 얹은 별장류의 주택이었다. 내부에는 사무실, 응접실, 침실, 부엌, 식당, 오락실 등의 공간을 갖추고 있었고 전통 한국주택과는 전혀 달라 인천의 볼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한때 일본인들 손에 넘어 갔던 이 건물은 1922년 인천 부립도서관이 되어 인천 시민에게 개방되기도 했으나, 6.25 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된 후 지금은 터럭만큼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세창양행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상업광고를 한 상점으로도 알려져 있다. 1886222일자 한성주보 제4호에 한문으로 된 '덕상 세창양행 고백(德商 世昌洋行 告白)'이라는 24줄짜리 광고를 게재했는데, 이것이 언론 매체를 통한 광고의 효시로 기록된다.

 

'광고'라는 말 대신에 중국식 표현인 '고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또 사는 것과 파는 것을 따로 광고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저희 세창양행이 조선에서 개업하여 호랑이, 수달피, 검은 담비, 흰 담비, , , 여우, 개 등 각종 가죽과 사람의 머리카락, , , 돼지의 갈기털, 꼬리, , 발톱, 조개와 소라, 담배, 종이, 오배자, 옛 동전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세창양행이 조선에서 개업하여 외국에서 자명종 시계, 들여다보는 풍경, 뮤직박스, 호박, 유리, 각종 램프, 서양 단추, 서양 직물, 서양 천을 비롯해 염색한 옷과 염료, 서양 바늘, 서양 실, 성냥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수입하여 물품의 구색을 갖추어 공정한 가격으로 판매하며 도매, 소매를 겸하고 속이지 않고 판매하고 있으니 모든 귀한 손님과 선비와 상인은 찾아와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장황하게 긴 문장으로 광고하였다. 세창양행은 75일자 제23호까지 약 6개월간에 걸쳐 광고를 계속하였다.

 

홈링거양행

 

이는 개항 초기 무역의 성격이 어떠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많은 외국 회사들은 조선으로부터 각종의 농수산물을 싼값에 사가는 대신 서양의 각종 흥미로운 공산품과 직물 등을 들여와 판매하며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또 최초로 신문 광고를 낼 만큼 발빠른 그들의 상술과 질 좋은 상품을 앞세운 경제 침탈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이밖에도 영국 상선 회사인 가딘 마티슨(Gardain Matheson & Co)이 세운 이화양행 인천출장소가 설립되어 소가죽 무역을, 일명 담손이 상사라 불렸던 타운선양행(Townsend & Co)이 설립되어 화약 공장을 운영하며 석유 판매도 겸했다. 담손이양행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스팀 동력을 이용한 방앗간을 만들어 운영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 영국계의 함릉가상회(Holme Ringer & Co) 인천출장소, 광창양행(Bennet & Co)이 설립된 것을 비롯하여 인천에서의 상공업 활동을 기반으로 많은 회사의 설립이 줄을 이으며, 인천은 상공업 중심 도시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됐다.

 

근대 우편 통신

 

인천우체사

 

1884년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도입된 근대 통신 수단인 근대 우편 업무가 인천에서 시행되었다. 18843월에 일본인들이 본국과의 통신을 위해 인천에 우편국을 설립한 것이다. 당시 우편국을 이용하던 사람들은 주로 일본인이었다. 이듬해 우리 정부에서도 우정총국 인천분국을 열면서 실질적인 인천우체국의 역사가 시작됐다. 서울보다 먼저 국내 우편업무를 취급했으므로 인천우체국은 결국 국내 근대우편업무의 효시인 셈이다.

 

초기의 우편 사무는 서울과 인천의 우편물을 서로에게 보내주는 것으로, 우편물 배달은 매일 오전 9시에 서울과 인천의 두 우체국에서 각각 집배원 한 명이 오류동으로 출발하여 그곳에서 만나 우편낭을 서로 교환하는 정도였다. 교환한 우편낭을 각자의 우체국으로 가져와 목적지로 배달하였다. 오류동은 서울과 인천의 중간으로 각 약 40리의 거리였다. 당시 집배원의 걸음은 매시간 10(4km)를 가도록 했고 신장기(오류동)에서 우편낭을 교환하는데 소요시간은 20분으로 정했다. 이에 따르면 각 우체국의 왕복 소요시간은 9시간 정도다. 이 정도의 배달 시간이라면 교통이 발달한 요즘의 우편물 배달보다 더 나은 형편으로 빠른 우편정도의 배달 속도라 할 수 있다.

 

전화가 흔하지 않았을 때는 급한 연락은 전기통신, 즉 전보(電報)로 이루어 졌다. 급히 전할 사항이 있으면 우체국으로 달려가 전하고자하는 내용을 말하면 우체국에서는 조사, 서술어를 빼고 아주 짧게 문장을 만들어 목적지의 우체국으로 연락한다. 이 연락을 전보용지로 인쇄하여 우체부가 곧바로 당사자에게 전달한다.

요즘도 전보가 사용되기는 하나 과거의 용도와는 달리 축하할 자리나, 애도를 표해야 할 자리에 직접 참석하지 못할 때 대신 그 뜻을 전하는 것으로 쓰이고 있다.

 

전보의 효시는 고종 22(1885)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조청전선조약(朝淸電線條約)을 체결한 후 인천을 기점으로 전선을 가설하여 그 해 9월 한성과 제물포간에 첫 전보가 떴다.

전신망은 청나라에 의해 가설됐는데 필요한 기구와 장비 그리고 기술 요원(150여명)을 모두 청나라에서 들여왔다. 이들은 인천에 가설 사무소를 열어 전주(電柱)를 세우고 전선을 가설하는 등 실제공사에 들어가 10여일 만에 인천 지역의 가설 공사를 끝낸 후 부평을 지나 한강을 건너 한성에 이르는 공사를 하였다.

 

그 때 청나라는 인천이사부(영사관)에 전신국을 설치해 운영했으며 전선을 천진으로 까지 확장했다. 그러던 중 일본이 조일해저전선가설조약(朝日海低電線敷說條約)에 위배된다고 항의하자 조선정부는 서울-부산간 전선을 가설하여 일본의 부산통신분국과 연결해 주기도 했다. 결국 경의선과 경부선 양선이 개통되면서 의주에서 부산까지 전신으로 이어졌다.

당시 가장 큰 전신망 수요자는 일본인이었는데,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일본 글을 취급하지 않았을 뿐 더러 전보료도 비쌌기 때문이다. 또 미숙한 가설기술과 풍수해 등으로 통신 두절도 빈번했고, 정확성과 신속성도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전보가 그만큼 낯선 통신수단이었기 때문에 유언비어도 많았다. ‘전선을 지키는 청나라 군인들에 의해 전보내용이 변조된다’, ‘전보는 전기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데 전기바람은 가뭄을 몰고 오는 까닭에 전보가 날아들면 그 지역에 가뭄이 든다’, ‘전보를 취급하는 전보사엔 전기귀신이 살고 있다’, ‘전신선을 통해 전염병이 옮겨 다닌다는 등이 그것이다.

인천의 전보사는 처음엔 인천 우체사(郵遞司)안에서 업무를 보았다. 그러다 러일전쟁 후인 1905년 한일통신합동운영협정에 따라 일본 통신기관에 흡수 통합됐다. 전보에 한글을 사용해 능률과 편의를 높이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 본 기사는 인천시 인터넷신문과 해반문화사랑회가 인천의 근대문화유산을 바로 알고 지키기 위해 공동기획한 글로 필자인 문상범 님은 인천고등학교 교사이면서 해반문화사랑회 감사로 활동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