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천의 역사

소 서 노

by 형과니 2023. 5. 10.

소 서 노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7-15 11:53:15

소 서 노

 

인천사 연구의 1세대 개척자는 고 박광성 교수였다. 선생이 주축이 된 인천교육대 산하 기전문화연구소(畿甸文化硏究所)는 미개척 분야였던 인천사에 비로소 학문적인 시각을 투사하기 시작했다는 영예를 누려 손색이 없다.

물론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 최성연 선생의 개항과 양관 역정,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 이훈익 선생의 인천지명고, 김양수 선생의 인천개항백경 등이 지역사 연구의 기름진 토양이 되었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와 같다.

인천사 연구는 그렇듯 시대에 따라 그 역할이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저간의 사정이었다. 오늘에 이르러 경제사, 건축사, 항만사, 행정사 등 각종 분야사(分野史)에까지 연구의 손길이 닿게 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는 지역사 연구가 전공 학자들의 손에 넘어갔음을 시사하는 예이다. 하지만 뜨거운 향토애로써 지역사를 해석하려는 경향도 없지 않은 듯하다. 비류의 어머니 '소서노'를 '인천의 어머니'로 기리자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지역 학자들은 그에 신중한 자세다. 그보다는 백성을 이끌고 미추홀까지 이주해 온 개척 정신과 건국에는 실패하였지만 양심적인 지도자로서의 '비류'를 기리는 것이 지역적 정체성 확립에 도움이 된다는 견해도 있다.

최근 시가 마련한 문화·역사 관계자 회의에서도 그 같은 견해가 피력됐다. 현 시점에서는 소서노와 비류와의 관계사(關係史) 연구가 더욱 진척돼야겠다는 요지였다.

문화 콘텐스의 개발이야 있을 수 있지만, 사상(祠堂)과 동상 건립 등은 '소서노'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가 무르익은 뒤에도 늦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조우성 객원논설위원
 
 
한국 역사상 유일한 창업 여제왕 소서노

나라를 건국하는 것을 천명(天命)이라고 한다. 나라를 건국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하늘의 명을 받아 가능하다는 뜻이다. 고려를 세운 왕건의 아버지 왕융은 집을 지을 때 36칸의 거대한 집을 지으면 큰 인물이 난다는 도선대사의 말을 듣고 그리 행하여 고려를 세운 왕건을 낳았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임금이 되기 전 파옥(破屋)에 들어가 등에 세 서까래 지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풀이한 무학대사가 세 서까래는 王자를 뜻한다고 하였는데, 그 말대로 이성계는 고려를 엎고 조선을 건국한 왕이 되었다.

이처럼 개국시조에게는 천명의 조짐이 전해진다. 물론 이는 개국조의 신성성을 나타내기 위함이지만, 그만큼 한 나라를 건국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위와 같이 개국조에게는 항상 신이한 이야기가 따라다닌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보면 한 나라도 아니고 두 나라를 창업한 인물이 있으니 그 위인은 바로 소서노(召西奴)라는 여성이다.

조선상고사를 저술한 신채호 선생은 소서노에 대해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건국한 조선 유일의 창업 여제왕이라 극찬하였다.

소서노는 졸본부여의 임금 연타발의 딸이라고 한다. 그녀는 부여왕 우태와 결혼했으나, 우태가 일찍 사망하여, 그와의 사이에서 난 비류와 온조를 기르고 있었다. 이 때 동부여에서 도망쳐온 주몽을 만나게 된다. 당시 22세 였던 주몽은 패기가 넘치는 인물이었다. 주몽의 재능이 보통이 아님을 간파한 소서노는 주몽과 결혼하게 된다. 당시 소서노는 37세였다. 미래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젊은 영웅 고주몽과 졸본지역의 세력가 소서노의 결합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졸본지역에는 다섯 부족이 느슨한 연맹을 이루고 있었다. 소서노는 다섯 부족으로 산재해 있는 졸본 지역을 통합하여 국가를 건국하는 것이야 말로 시대적 과제라 생각하였다. 졸본으로 망명한 주몽은 스스로를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이라 주장했다. 당시 토착 세력들은 그를 거들떠 보지 않았지만, 소서노는 그런 토착세력과는 다른 눈으로 주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길 대신 졸본의 변화를 추구하는 길을 택하기로 하였다.

소서노에게 중요한 것은 토착세력이냐 이주세력이냐의 여부가 아니라 능력이었다. 토착세력들은 단신이다시피 졸본으로 망명한 주몽을 거들떠 보지 않았지만, 소서노는 주몽의 능력을 간파하였다. 총명한 머리, 신기에 가까운 활 솜씨, 뛰어난 무예 실력... 이러한 주몽의 실력을 높이산 소서노는 결국 그와 결혼하였다.

고주몽과 소서노의 결합은 졸본 지역에 산재해 있는 부족들을 통합시킬 새로운 힘의 탄생을 의미했다. 토착세력과 이주세력의 결합... 이로써 만주와 요동~요서를 아우르는 대제국으로서, 수 당과 천하를 놓고 다툰 고구려가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소서노의 힘과 재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고구려의 탄생... 그만큼 고구려는 절대적으로 소서노의 힘이 아니었으면 등장하지 못했을만큼 소서노가 고구려 건국에 이바지한 점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원전 19년 동부여에서 예씨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유리가 고구려로 옴으로써, 소서노의 운명은 바뀌었다. 주몽을 왕으로 앉히는데 일등공신이 소서노임에도 불구하고, 주몽은 자신의 후사를 유리로 삼은 것이다. 주몽에게서 배신감을 느낀 소서노는 결국 자신이 새로이 나라를 건국하기로 결심한다. 고구려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힘이 되어준 소서노는 힘으로 유리를 내쫓고 자신의 아들을 등극시킬 수 있었으나, 그녀는 새로운 나라 창업의 길을 택하였다.

소서노가 고구려 건국에 얼마나 지대한 공이 있는지는 비류가 온조에게 한 말에서 나타난다.


"장차 대왕께서 부여에서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오셨을 때 우리 어머니께서 가진 재산과 노력을 모두 기울여 나라를 세우도록 도왔다. 지금 대왕이 세상을 떠난 이후 나라가 유리에게 돌아갔다. 우리가 여기에서 불필요한 혹처럼 지내느니,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 지방으로 가 좋은 땅을 택해 나라를 세우는 것이 낫겠다"

기원전 19년 소서노는 오간, 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남쪽 신천지를 향했다. 그런데 소서노, 비류, 온조가 떠날 때 오간, 마려 등의 신하와 많은 백성들이 따랐다는 것은 그만큼 소서노의 세력이 강성했음을 뜻한다. 남쪽으로 내려가 패수와 대수를 건너 한산에 도착하였다. 이 때 비류는 미추홀을, 온조는 한산 부아악을 놓고 어디를 수도로 삼을 지 논쟁하였다. 온조와 그를 따르는 오간, 마려 등은 한산 부아악이 수도로 삼을 장소라 주장하였다. 그들은 하남의 땅이 북쪽으로는 큰물을 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뫼들에 의지했고,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판이 펼쳐졌고, 서쪽은 큰 바다가 막고 있으니 하늘이 내린 요지라 하여 이 곳을 수도로 삼을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바닷가에 면한 미추홀에 도읍을 정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그는 바다에 자리잡으면 세 가지 이로운 점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 바다에서 고기 잡고 뭍에서 농사를 지으면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 둘, 바다를 끼고 있으면 군사의 이동이 쉬워 해외로 뻗어나기기 쉽다는 점 셋, 감당하기 힘든 강자의 공격을 받으면 배를 타고 바다로 피할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온조와 열 명의 신하의 반대가 거세어 결국 비류와 온조는 갈라지고 말았다. 비류는 미추홀에 도읍하여 백제를 세우고,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하여 십제를 세웠다. 소서노는 비류의 편을 들었다. 이로써 비류백제와 온조백제는 갈라지게 되었다.

비류와 온조의 불화, 대립이 심하자 소서노는 미추홀과 위례성을 오가며 타이리고 설득했지만 이미 벌어질대로 벌어진 양 진영은 타협조차 하지 않으려 하였다. 게다가 온조는 독립을 선언하여 비류와 소서노의 밑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서기 6년 소서노는 결단을 내렸다. 날쌔고 범같은 장수 5명과 함께(5명만으로 잡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5명은 소서노를 따르는 다섯 장군을 뜻한다고 보여진다) 위례성에 잠입한 것이었다.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의 불화가 오간, 마려 등 열 명의 신하 때문이라 생각하고 그들을 제거하고 비류, 온조 두 형제를 화해시켜 분리된 두 나라를 하나로 합치려 하였다. 그래서 비밀리에 장수 5명과 함께 위례성에 잠입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이를 예상한 오간, 마려는 미리 군사를 매복시켜 소서노와 특공대원을 죽였다. 이로써 소서노의 기습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창업 여제왕 소서노는 이렇듯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조를 보면 이상한 기록이 있는데, 김성호씨를 비롯한 사람들은 이 기록이 국모(소서노)를 시해한 참극을 은폐한 기록이라고 한다.

"왕도에 늙은 여자가 사내로 변하고 다섯 호랑이가 입성하니 61세의 왕모가 사망했다"

비극의 해 서기 6년인 온조왕 13년은 비류의 재위 연대인 동시에 온조가 비류와 분립한 첫 해를 가리키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단재는 조선상고사에서 온조왕 13년은 곧 소서노 여왕이 치세 마지막 해요, 그 이듬해가 온조왕의 원년이라고 주장하였다.

소서노가 죽은 후 온조는 천도를 단행하였다. 조선상고사를 보면 온조가 "모씨(소서노)와 같은 성덕이 없고서는 이 땅을 지킬 수 없다"며 천도를 단행하는데, 이는 백제 창업에서 소서노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했는지 말해주는 것이다.

고대에 여성의 몸으로, 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것도 한 나라가 아닌 두 나라를 개창한 인물은 세계 역사에서도 그 유례가 드물다. 그렇기에 소서노는 우리 역사 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인물이다.

참고: 김산호, 대쥬신제국사

신채호, 조선상고사

이덕일, 이덕일의 여인열전

황원갑, 한국사를 바꾼 여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