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과 병와 이형상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7-18 22:09:14
인천과 병와 이형상
이영태(인하대 BK21 연구교수)
# 인천에 대한 그리움
병와 이형상(李衡祥)은 인천 죽수리(竹藪里) 소암촌(疏巖村)에서 태어났다(효종 4년, 1653년 5월). ‘소암촌’이 주안의 ‘석바우’라는 주장도 있지만 실상은 동춘동에 딸린 ‘소암마을’이 그곳이다. 그의 호는 병와(甁窩) 또는 순옹(順翁)이며, 본관은 완산(完山)으로 효령대군 10세손이다.
▲ 청학동부근모습
25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29세 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벼슬을 시작했다. 병와는 환로의 대부분을 성주목사·청주목사·동래부사·경주부윤·제주목사 등 외직에서 수행했다. 그의 나이 48세 때인 1700년(숙종 26) 경주부윤으로 재직 중 상관과의 마찰로 인해 벼슬을 사직한 후 영남의 영천에서 호연정(浩然亭)을 지어 은거생활을 했다.
그는 30여 년간 이곳에 은거하면서 제주목사와 영광군수를 잠깐 역임했을 뿐 조정으로부터 제수받은 경원부사·장례원 판결사·장단 부사·첨지중추부사·호조참의 등을 모두 사직하고 오로지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을 했다. 그는 76세 때인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가선대부에 됐으나 적당과 내통한다는 혐의로 체포된 후 서울로 압송됐다.
그 후 곧 무고함이 밝혀져 석방됐으나 국문을 받은 후유증과 선의대비(宣懿大妃) 국상이 겹쳐 영천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이때부터 그가 81세 때 과천의 객사에서 병을 얻어 졸하게 되는 1733년(영조 9)까지 약 5년 동안 고향인 인천에서 거주하게 된다. 즉, 인천에서 태어나 평생을 거의 외지에서 생활했던 병와가 졸하기 전 마지막 생의 5년을 고향인 인천에서 생활했다.
그는 142종 326책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특히 이 기간에 집필한 게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소성록(邵城錄)』과 『소성속록(邵城續錄)』이다. 『소성록』은 그가 77~79세 때인 1729~1731의 작품을 1책으로, 『소성속록』은 그의 나이 79~81세 때인 1731~1733의 작품을 1책으로 엮은 것이다.
『소성속록』에는 266수의 시와 64편의 산문이 실려 있다. 시는 오언 절구 41수, 칠언 절구 55수, 오언 율시 20수, 칠언 율시 143수, 오언 고시 4수, 잠(箴) 1수, 악부 2수 등이다. 그리고 산문은 제문 6편, 편지글 8편, 가례(家禮)의 규식(規式) 6편, 경전관련 7편, 서(序) 8편, 기(記), 설(說), 논(論)이 각 2편, 기타 23편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 시는 정경을 묘사한 작품이 다수를 차지한다. 특히 ‘오가팔영(五嘉八?)’이라는 시는 <백운청람(白雲晴嵐)>, <자연제월(紫烟霽月)>, <삼옥낙조(三玉落照)>, <팔미귀범(八尾歸帆)>, <가라과농(迦羅課農)>, <구담방석(瞿曇訪釋)>, <송산방목(松山放牧)>, <동강조어(桐江釣魚)>의 8풍경을 읊은 것으로 7언 율시와 5언 율시, 5언 절구 등의 형식으로 바꾸어 가며 5편이나 실려 있다. 이는 8경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연도(지금의 영종도)의 풍경을 읊은 것이다.
먼저 인천에 대한 그리움을 향상 견지했던 그의 모습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략)……
칠개월간 서울에 있다 인천으로 가니 七朔在京下仁川
고향으로 돌아온 것 내 소원을 다한 셈이요 旨丘歸來志願畢
마음 편히 행세(行世)하다 거침 없이 돌아가 니 恬然行世浩然歸
아무 해 아무 달 아무아무 날 이러라 某年某月某某日
……(후략)……
57세 때에 지은 <진댁명(眞宅銘)>으로 68세 때 한 번 고쳐 썼으며, 79세 때 다시 앞의 내용에 첨가한다. 그의 나이 79세 때면 이인좌의 난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국문을 받은 후 곧 무고함이 드러나 방면돼 잠시 서울에서 머물다가 인천의 조카집으로 가서 의탁하고 있을 때다. 무고함이 판명된 심리를 감안하더라도 ‘고향으로 돌아온 것으로 소원을 다한 셈’이라는 표현에서 그가 고향 인천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병와는 항상 인천을 잊지 못했다. 그는 외지에 있으면서도 항상 인천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인천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 바탕에는 그가 태어난 곳에 대한 자긍심까지 자리잡고 있었다.
▲ 소성속록
여기는 정말 정기를 함육하는 곳이다. 네 가문의 선산이 모두 한 곳에 있고, 우리들은 여기에서 태어났으며, 죽마고우(竹馬故友)로 절친하게 살아온 것은 저 멀리 6·7대(代)를 거스르는 옛날부터 그래왔다. 돌아가신 부로(父老)들이 남긴 업적은 이미 마을 사이에 구비(口碑)가 되었고……한 마을 안에 고관이 넷이니 우리 마을은 지령(芝嶺)이 아니될 수 있는가.
병와는 자신의 고향이 정기를 함육하는 곳이라 한다. 그렇기에 죽마고우들이 고관이 되고 80세 이상의 장수를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곳이기에 ‘우리 마을은 지령(芝嶺)이 아니될 수 있는가’라며 고향의 공간적 인적 자부심이 대단하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자족적인 데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은 다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향 소식 전해온 곳 지극히 처연한데, 鄕音傳處極悽然,
열명 넘게 죽은 노비 가련하여라. 過十家?最可憐.
생각하니 주린 영혼 응당 나를 비웃고, 想得飢魂應笑我,
모든 것이 고루 넉넉한 고을에는 九調饒邑一無田.
하나같이 밭이 없다네.
흉년이 들자 인천 고향집에 있던 노비가 여럿 아사(餓死)했는데 이에 대한 소식을 듣고 병와는 그들이 귀신이 돼 자신을 비웃지 않을까 염려한다. 당시 노비에 대한 처우를 감안할 때, 병와를 실학적 경세인으로 규정하는 게 틀리지 않는다.
자신이 태어난 공간에 대한 긍지와 그곳에 있는 자들에 대한 애민을 통해 병와의 인천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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