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에 밀린 방송 사각지대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7-11 10: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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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에 밀린 방송 사각지대
글·조우성 시인·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
세계 최초의 방송은 1920년 11월 미국 웨스팅하우스 사(社)의 ‘KDKA 국(피츠버그 소재)’이 제29대 미 대통령 선거날, ‘하딩’의 선거 결과를 보도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7년 뒤, ‘JODK’ 경성방송국이 세계에서 6번째로 개국했다. 출력은 1kw, 주파수는 870㎑였는데, 불행히도 이 방송은 우리 것이 아니었다.
J ODK’란 호출부호와 ‘방송(放送)’이라는 명칭도 우리 것이 아니었다. 토쿄방송이‘JOAK’였고, 경성방송국은 그 네 번째 돌림자인 ‘JODK’였다. ‘방송’이란 용어도 제1차 세계대전 때 일본 기선 삼도환(三島丸)이 아프리카에서 ‘경고’ 무선을 수신하고, 이를 통신 일지에 ‘방송을 수신했다’고 기록한 데서 비롯된 일본 용어였다.
그렇게 알려진 ‘방송’이었지만, 개화기 때 선대들은 우리 손으로 방송을 세우고자 민간 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 노력의 하나로 1924년 12월 17일에는 조선일보를 비롯한 11개 민간 단체가 서울 우미관에서 공개 시험 방송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끝내 한국인의 방송국 설립을 불허하였고, 식민 통치의 전위 기구를 자임하고 나선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을 1927년 2월 16일 출범시켰다. 초창기 사용 언어는 일어 3, 한국어 1의 비율이어서 어느 나라 방송인지 구별조차 안 됐다.
더구나 쌀 한 가마가 15원이었는데, 동경에서 수입해 온 진공관 라디오 한 대 값이 100원이 넘는 고가여서 청취자는 극소수였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개국 초기 국내 라디오는 1천440대였고, 그 중 한국인 소유는 275대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그런 연유로 경성방송국은 청취자 확보에 열을 올렸다. ‘방송 붐’을 조성하기 위해 전국 각처를 다니며‘라디오 청취회’라는 모임을 개최하였고, 1927년 5월 23일 인천 ‘애관극장’에서는 방송 상식 보급을 위한 ‘방송 강연회’도 열었다.
한편, 일제는 식민 통치의 일환으로 부산, 평양, 대구, 광주 등 전국 21개 지역에 방송국을 차례로 설치해 나갔다. 그러나 인천만은 예외였다. 서울과 동일한 가청권이라는 논리였다. 어쩐 일인지 광복 후까지 그 논리는 계속이어져 방송에 관한 한 인천은 인구 30여 만명 정도의 지방 소도시만도 못한 사각 지대로 놓여 있었다.
그같은 왜곡된 방송 현실에 처음 이의를 제기한 이는 임홍재 인천시장이었다. 1946년 임 시장은 ‘인천방송국 설치’를 역설하고 나섰으나 서울중앙방송국으로부터 ‘인천부청(仁川府廳)의 시간’을 할애받는 데 그쳤고, 후임 표양문 시장의 노력도 불발로 끝났다.
그 10년 뒤인 1956년, 극동지역 선교 방송인 HLKX가 학익동 갯벌 위에 송신 안테나를 세우고, 1962년에는 자유공원에 스튜디오를 개설하는 등 ‘특수방송 시대’를 열었다. 현 시립합창단 윤학원 지휘자가 프로를 맡는 등 일정 부문 지역 문화에 기여했으나 1967년 서울 마포로 이전해 인천은 다시금 방송의 암흑기를 맞았다.
인천 지역 사상 최초로 순수 민간 방송국이 세워진 것은 그로부터 30년 뒤인 1997년 10월 11일이었다. iTV 인천방송(仁川放送)이 첫 전파를 인천 하늘에 발사한 것이다. 시민들은 TV 앞에 앉아 ‘개국 특집 뉴스’를 보며 우리도 방송국을 갖게 됐다는 자긍심과 함께 그동안의 아쉬움을 단숨에 날려 보냈다.
그러나 개국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iTV가 존립하기 위해서는 TV 안테나를 추가로 달 필요가 없는 송출 방식이어야 하는 데도 방송위는 UHF 송출을 고집했고, 결국 iTV는 원천적으로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 출발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 광고 시장의 잠식을 염려해 시청 권역도 인천시 일원으로 국한시켜 말이 ‘지역 방송 시대의 개막’이었지, 사실은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 난산(難産)이었다. iTV는 메이저 방송의 프로를 재송신해 연명하는 타 지역 방송과는 달리 애초부터 운명이 달랐다.
편성권의 자율을 누리는 어엿한 ‘독립국(獨立局)’으로 출발해 많은 기대를 모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막대한 제작비를 감당하기에는 모든 여건이 불리해 결국 ‘부실 경영’이라는 원천적으로 강요된 멍에를 지게 됐던 것이다.
전말이야 어떻든 시민의 숙원이었던 ‘인천방송’이 ‘경인방송’으로 개명하더니 결국에는 2004년 12월 ‘방송 정지’라는 모욕의 구정물을 뒤집어쓰고 말아 시민들은 한국 방송 사상 최초의 정파 사건을 못내 내 일처럼 가슴 아파했다.
그 후 3년만인 2007년 12월 28일 탄생한 것이 OBS 경인방송이었다. 일단 환영해 마지않았으나 시청자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국은 했다는데, 방송을 제대로 시청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방송위의 허가 내용이 과거 iTV 인천방송 시절과 원천적으로 달라진 게 없었고, 결국 각 가정에서 돈을 들여 안테나를 새로 설치하거나 케이블 TV에 의지하지 않으면 시청할 수 없게 됐던 것이다.
전파(電波)는 국가의 중요 자산이요, 그 실질적 주인은 국민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전파 가운데 적어도 인구에 비례한 지분이라도 인정하는 정책을 구현해야 한다. 시청자의 권리보다 메이저 방송의 독점적 지위 확보에 주안점을 두는 정책이 아닌 다음에야 ‘TV로 시청할 수 없는 TV 방송’을 개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렇듯 270만 인천 시민은 방송에 관한 한 ‘비원(悲願)’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만든 우리 방송을 듣고, 보고 싶은 것이다. 지역의 균등한 발전을 위한다면 지금처럼 지역 방송을 규제의 틀 속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메이저 방송의 전파는 인천하늘을 뒤덮어도 인천의 전파는 서울하늘을 나를 수 없다는 논리는 이제 통하지 않는 다매체 방송 시대가 된 것이다.
전파(電波)는 국가의 중요 자산이요, 그 실질적 주인은 국민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전파 가운데 적어도 인구에 비례한 지분이라도 인정하는 정책을 구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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