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잡시에 나타난 한적과 우울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7-08 19:21:19
인천개항장 풍경(3) - 인천잡시에 나타난 한적과 우울-
이영태 인하대 BK21 연구교수
1892년 4월부터 1893년 3월까지 1년 정도 인천전환국에 파견돼 있던 일본인 요코세 후미오(橫瀨文彦)의 눈을 통해 당시의 인천모습을 살필 수 있다. 물론 그의 시선이 인천을 객관적으로 응시하고 있지 않았다
▲ 개항기 인천항
는 점은 앞선 인천역사산책에 기술한 바와 같다. 자국(일본)에 대한 자긍심과 그 뒤켠에 자리잡고 있는 영국과 청국에 대한 경계, 그리고 위생적으로 보이지 않는 조선에 대한 시선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해문낙조>
사람들이 바다 가운데로 들어갔다 돌아오고,
개흙 모래에 거대한 배가 몇 척 정박해 있구나.
뱃사공은 다만 조수가 밀려들기 기다리고,
같은 모양의 돛을 펼치기는 한 순간이다.
또 말하길, 조수(潮水)의 높이가 30척이니, 평평한 모래사장이 몇 리나 되다가 갑자기 물결이 해안에 부딪친다. 이것이 이 항구의 한 가지 기이한 광경이다.
<세탁>
새어나온 등장 불빛에 새벽 기운 생겨나고,
물 같은 무명이불 속에서 새벽을 기다린다.
물건을 두드리는 소리 귀에 들려오니,
차가운 샘터 곳곳에서 들리는 빨래 소리.
▲ 1890년대 인천항
또 말하길, 물에 옷을 담구고 나무 방망이로 두들기니, 일본 사람들이 손으로 주무르는 것과 다르며, 두들기는 소리가 난다.
제목에 나타난 대로 ‘낙조’는 한가함과 평온함을 나타내고 있다. 하루 일과를 정리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시간을 알리는 게 낙조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돌아오고 거대한 배가 정박한 모습은 한가함과 다름 아니다. 물론 마쓰모도가 단평을 부기한 것처럼 ‘조수(潮水)의 높이가 30척’이라는 조수간만의 차에 따른 것이겠지만 어쨌건 평화로운 모습이다.
평화로움은 ‘세탁’이라는 한시에서도 여전하다. 빨래를 하기 위해 새벽을 기다려야 했던 아낙들의 심리, 그들이 새벽까지 덮고 있던 ‘물 같은 무명이불’이 왠지 낯설지 않다. 그리고 ‘차가운 샘터 곳곳에서 들리는 빨래 소리’는 방망이로 두드리는 소리도 마찬가지다. 이에 대해 마쓰모도는 일본인들의 빨래습관 ‘손으로 주무르는 것과 다르다’고 지적하고 있다.
<부두>
길가에는 띠풀로 지붕을 이은 집들이 줄지어 있어,
멀리서 바라보니 연달아 있어 달팽이집과 같구나.
저자거리에는 창고가 없으니 어찌 이리 서투른가,
이것이 개항(開港) 초의 모습이다.
또 말하길, 탄식할 만하다.
<만행봉(萬杏峯)>(장미도(薔薇島) 월미도(月尾島) 별칭이다.)
▲ 월미도에서 본 중구일대
사람이 잠든 부두 밤기운은 깊은데,
눈 같은 서리는 사람을 추위로 몰아낸다.
강 건너 짖는 개는 범보다 사납고,
만행봉(萬杏峯) 꼭대기에 쟁반 같은 달이 떴다.
또 말하길, 추운 밤의 진정한 모습으로, 읽고 나니 모발이 송연(悚然)하다.
조선의 개항은 자발적 계획에 따라 철저히 준비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는 점을 반증하는 부두의 모습이다. 제물포 부두를 소재로 삼은 한시에서 ‘띠풀로 지붕을 이은 집(초가집)’이 ‘연달아 있어 달팽이집’처럼 보인다고 한다. 개항을 했지만 제대로 된 창고조차 없었다고 하자 이에 대해 마쓰모도가 ‘탄식할 만하다’고 단평하고 있다. 그리고 월미도 쪽에서의 개 짖는 소리가 범보다 무서울 정도로 유독 크게 들릴 만큼 부두의 밤은 고요하기만 하다.
작자가 1892년 4월~1893년 3월 인천에 머물렀는데 위의 한시는 체류기간 사이에 있는 겨울에 부두를 소재로 삼은 것이다. 한편 『인천사정』(1892)에 월미도에 대해 “섬 안에 살구나무가 많아 4월 꽃이 필 무렵 인천항에서 그것을 보면 일대가 붉은 노을 같다. 초가집 여러 채가 그 사이에 가득하여 마치 그림 같다”고 한 것과 겨울의 월미도는 대비되고 있다.
▲ 월미도와 잔교
<담군>(조선말로 지계훈(智計勳, 지게꾼)이니 짐꾼이다.)
한 개의 작대기와 두 개의 나무 가지를 지고 오니,
흰 옷은 더럽고 얼굴엔 성긴 수염이 가득하다.
굶주린 여러 개들이 먹이를 앞에 놓은 것과 같으니,
바로 여러 사내들이 짐을 다투는 때이다.
그들이 짐을 옮기는 도구는 ‘한 개의 작대기와 두 개의 나뭇가지’로 만든 것이며, 그들의 모습은 ‘성긴 수염이 가득하고’, ‘흰 옷은 더럽다’고 한다. 근대의 위생개념과 동떨어져 있는 지게꾼들이 기계문명의 도움 없이 제작할 수 있는 지게에다 짐을 실으려고 다투는 것을 ‘굶주린 여러 개들이 먹이를 앞에 놓은 것과 같다’는 지적에서 우울함을 떨쳐낼 수 없다.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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