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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역사

종鐘과 오포午砲 그리고 사이렌

by 형과니 2023. 5. 10.

과 오포午砲 그리고 사이렌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7-09 13:55:04

 

시각을 알리던 옛 소리들

과 오포午砲 그리고 사이렌

 

·조우성 시인·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

 

제야(除夜)의 종소리를 들으며 무자년 새해를 맞았다. 종을 쳐서 백성들에게 시각을 알렸던 일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조선 시대에는 그를 인정(人定)’이라 했다고 한다. 서울의 보신각 종을 비롯해 전국 각처의 요충지와 큰절에서는 2(二更)10시를 기해 종을 28번 쳐 통행 금지를 알렸다. 반면에 5(五更)인 새벽 4시경에 33번 치는 종은 파루(罷漏)라 했다.

 

인정이 울리고 나면, 순라군은 화재, 도둑 등을 예방하기 위해 성 안을 돌았고, 통금 위반자를 잡아들였다. 초경과 5경 위반자는 곤장 10, 2·4경은 20, 3경은 30대에 처할 만큼 규율이 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1890년대에 들어와서는 남녀별로 따로 시간을 정한 이색적인 야간 통금을 실시하기도 했지만,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 이 제도는 자취를 감추었다. 경찰과 헌병의 엄혹한 감시 아래서는 별도의 통금 제도가 필요치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인정과 파루도 있을 리 없었다.

 

그 무렵, 인천도호부 청사가 자리 잡고 있었던 문학리(文鶴里·지금의 남구 문학동)에서 한참 떨어진 포구(浦口) 제물포가 개항장으로 열리면서, 제물포는 1883년 이후 인천읍내 문학리를 제치고 일약 인천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일본, 청국을 비롯해 영국, 러시아, 독일, 미국, 프랑스 등 세계 각국의 선교사, 외교관, 상인, 군인, 학자 등이 속속 들어왔고, 더불어 제물포에는 그 전에는 듣도 보도 못했던 서구의 신문물이 하루아침에 쏟아져 들어왔다.

 

이에 따라 새로운 일자리가 나날이 늘어갔다. 전국 각처에서 일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몰려들어 북적거렸고, 상업이 번성해짐에 따라 시간을 다투어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노동 활동이 왕성한 낮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하고자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해의 위치를 따져 시각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지만, 시계가 흔치 않을 때라 정확한 시각을 알 수는 없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에게 낮 시간의 정점인 정오를 알려 휴식과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마련한 시보가 오포(午砲)였다.

 

지금의 중구 자유공원 제물포 고교 뒷산인 인천측후소 앞에 대포를 걸어놓고 낮 12시 정각에 대포 한 방을 허공에 쏴, 그 소리로 정오를 알렸던 것이 오포였다. 옛 로마 때부터 시작된 오포가 우리나라에서는 19062월 인천 제물포에서 부활한 것이다.

 

고로(古老)들의 말씀으로는 하는 대포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인천부(仁川府)가 들썩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근대 문화의 이식 과정이 대부분 그렇듯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비일비재했다. 어떤 때는 15분이나 지나도 대포가 울리지 않아 빈축을 샀고, 오발로 관측소 소속 오포수(午砲手)가 손가락을 8개나 잃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오포는 지금의 자유공원 홍예문 위에 있던 인천상비소방소의 감시탑에서 사이렌으로 시보를 알리던 1925년까지 건재했다. 점심때가 되면 인천 하늘에는 무슨 공습경보를 알리는 듯한 긴 사이렌 소리가 정오를 알렸던 것이다.

 

광복 후, 사이렌 소리는 정오가 아닌 자정에 울리게 되었다. 194597, 미 군정청이 치안 유지를 위하여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를 통행금지 시간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통금 싸이렌 소리는 인천의 밤하늘을 매일 엄습했다.

 

그 당시만 해도 인천의 중심지는 지금의 중구 일원이었다. 외곽 지대인 도원동에서 주안역에 이르는 길에는 염전과 논밭들만이 무인지경으로 이어져 있었다. 경동 싸리재, 내동 양품점거리, 신포동 시장, 송학동 자유공원, 해안동 선창가는 이름만 들어도 파스텔 물감처럼 추억이 묻어나는 곳들이다.

 

통행금지가 해제된 것은 198215일이었다. 사이렌 소리는 60년대 이후 사라졌지만, 그와 더불어 한겨울 바람과 함께 골목길을 헤매던 메밀묵!’ 소리와 야경꾼의 딱딱이 소리’, 자정이 되면 은은히 울리던 답동성당의 종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는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초고층 아파트와 우후죽순으로 솟아오른 빌딩들이 문화와 역사 혹은 추억에 얽힌 정다운 소리들을 모두 가두거나 거두어 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면 그간 살기에 바빠 우리는 정작 삶의 스카이라인조차 생각지 않고 살아오지 않았나 후회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