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개항장 풍경(1)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6-23 15:55:11
인천개항장 풍경(1)
- 일본인의 한시(漢詩)에 나타난 개항장-
▲ 이영태 인하대 BK21 연구교수
1883년 인천이 개항되자 인천 개항장은 일본, 중국인은 물론 각국인들이 몰려들면서 이른바 각 나라의 거류지가 조성돼 상당히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내었다. 당시의 모습은 각국인들이 묘사한 기록을 통해 단편적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중 특히, 『신찬인천사정(新撰仁川事情』(1898)과 『인천부사(仁川府史)』(1933)에는 전거를 밝히지 않은 한시(漢詩)가 등장한다. 이것은 마치 해당 집필자가 한시로 소회(所懷)를 읊은 것인 양 착각할 정도로 일문(日文)과 뭉뚱그려 섞여 있기에 일어 번역자에게 난감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1893년 발간된 『인천잡시(仁川雜詩)』에 있는 한시다. 이 한시는 1892년 4월부터 1893년 3월까지 1년 정도 인천전환국에 파견된 요코세 후미오(橫瀨文彦)가 인천과 관련된 소재 42개를 7언 한시 형태로 쓴 것이다.
금융, 병원, 학교, 영사관, 세관, 우편국, 담군[지게꾼], 세탁 등 42개를 소재로 삼은 한시는 인천의 다양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다. 당시의 인천 모습을 읽어낼 수 있는 자료는 여럿이지만 개인의 소회를 한시로 풀어낸 것이 흔하지 않다는 점에서 『인천잡시』는 방증할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이 책자에 대해 서문을 쓴 마쓰모도(松本正純)가 “이것은 인천지지(仁川地誌)로 유람을 다니지 못한 사람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니, 어찌 출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로 진술한 것처럼 인천과 관련된 자료로 충분하다. 게다가 요코세의 한시 1편에 대해 마쓰모도의 단평이 부기돼 있어 당시 일본인들이 인천과 관련된 소재 42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것은 덤이기도 하다.
다음은 요코세의 한시에 대해 마쓰모도가 단평을 부기해 놓은 것으로 당시 인천의 상황을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다.
▲ 인천세관
세관
영국 일본 청 나라 한국 이태리 독일로 나뉘어,
이음동어(異音同語)의 공문서가 뒤섞여 있다.
세상의 풍속은 아직 옛 모습을 수습하지 못했는데,
나 홀로 세관에서 신기함을 보았다.
또 말하길,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하나의 관아에 모여 있어 그들을 서로 짝지을 수 없으니, 신기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세관의 사무실에 영국, 일본, 청, 한국, 이태리, 독일 등 각 나라의 언어가 뒤섞여 있다. 필자는 이런 모습을 ‘이음동어(異音同語)의 공문서가 뒤섞여’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세관이 각국의 목적이 충돌하는 공간이니 만큼 마치 동상이몽(同床異夢)이란 고사성어를 연상케 한다. 이것은 마쓰모도가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하나의 관아에 모여 있어 그들을 서로 짝지을 수 없으니, 신기한 일’이라 단평한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필자가 나라의 이름을 ‘영국, 일본, 청’ 등으로 배열한 순서를 통해서도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세관은 1883년 6월 16일 우리나라 최초로 인천에 창설돼 업무를 개시했을 때, 초대 세무사는 영국인 스트리플링(A. B. Stripling; 薛必林)이었다. 세관은 청의 세관을 본받아 창설한 것이기에 초기부터 청의 영향 하에 놓여 있었다. 특히 총세무사의 임명권을 청이 주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갑오개혁(1894년)까지 청국세관에서 파견된 총세무사와 외국인 세무사들에 의해 관리·운영됐다.
세관에서 청이 주요한 기능을 담당했지만, 필자는 유독 영국에 경계심을 두고 있는 셈인데 이는 다음의 한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국영사관
▲ 영국영사관
산허리 모퉁이에 공관(公館)의 기가 나부끼고,
붉은 난간 흰 벽이 높다랗구나.
세상 사람들은 후일(後日)의 기도(企圖)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다만 거주하는 영국인이 드물다고 말한다.
또 말하길, 영국인들은 상가(商街)에서 기거하지만 없는 것처럼 조용하다. 그러나 영사관을 설치한 것을 보면 후일의 추세(趨勢)에 대해 알 수 있다.
『인천잡시』에서 ‘영사관’을 소재로 삼은 것은 일본영사관과 영국영사관뿐이다. 일본인의 눈에 비친 영국영사관은 부정적이다. ‘붉은 난간 흰 벽이 높은’ 곳에 있는 자들이 ‘후일(後日)의 기도(企圖)’를 도모하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그들의 움직임이 얼마나 은밀한지 왕래하는 사람이 드물게 보일 정도다. 영국에 대해 마쓰모도도 영국인들은 조용하지만 ‘후일의 추세(趨勢)’가 있을 것으로 예견하는 단평에서 필자처럼 영국에 대한 경계심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자국의 영사관에 대해서는 딴판이다.
▲ 일본영사관
일본영사관
온 세상의 남녀는 하늘과 땅을 작게 여기고,
고락을 함께 하니 형제와 같다.
배가 해문(海門)에 들어오니 사람들은 환호하고,
일장기는 아침 햇살에 번쩍거린다.
또 말하길, 외국에 와서 일본 국기를 보았다. 강대한 사람의 뜻이 담겨 있으니, 규쾌(叫快) 두 글자를 헛되이 끌어다 쓴 것이 아님을 알겠다.
부두로 들어온 일본 배를 향해 사람들이 환호하는 게 지극히 당연하다고 한다. 그것도 ‘아침 해살에 번쩍거리는’ 일장기를 달고 있으니 말이다. 요코세의 이러한 진술에 대해 마쓰모도는 ‘배 들어 오는 것을 보고 환호하는 모습’을 규쾌(叫快)로 표현한 것이 시의적절하다고 한다.
이렇게 인천 개항장을 한시의 형식으로 그것도 이국적인 건축물을 중심으로 읊었던 것은 독특한 방법이다. 저자인 요코세(橫瀨文彦)와 서문을 쓴 마쓰모도(松本正純)는 일본에서 파견된 전환국 직원으로 인천의 화도(華島)전환국 관사에서 함께 살았으며 서로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였다. 전환국은 설립 당시에 일본인 마스다(增田信之)가 많은 돈을 투자해 1892년 5월 건축공사를 시작, 11월에 준공했는데 1893년 3월 한국정부와 마스다 간의 계약이 파기되면서 이후 전환국 운영은 한국인이 하게 됐다.
▲ 인천잡시
그러므로 인천전환국 설립초기에 파견돼 왔던 작가는 1년 정도의 짧은 기간 인천에 머물렀지만, 그런 가운데도 틈틈이 인천을 둘러보면서 시 40여 편을 한 달여 만에 지었다. 그가 시인도 역사가도 아니었기에 비록 사실을 기록하는 것에 그쳤지만, 당시의 이모저모를 알 수 없는 현재로서는 개항장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시로 쓴 한 편의 역사기록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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