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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역사

월미도 역사유적지

by 형과니 2023. 5. 9.

월미도 역사유적지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6-27 10:22:33

 

월미도는 면적 0.7의 작은 섬으로 해발 105m의 월미산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긴 삼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다.

반달의 꼬리를 닮았다 하여 월미란 이름이 붙여졌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월미도는 백제 이후 해상교역이 활발하던 고려에 이르기까지 자연도(영종도)와 함께 중요한 교통로였고 조선 시대에는 한양수도를 지키는 군사기지 였으며 월미행궁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개항기에는 강화도를 거쳐 한강을 통해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관계로 외국의 선박들이 조선으로 들어오기 위해 머무는 첫 기착지로써 강화도, 영종도와 함께 수난이 많았던 섬이었다.

 

월미도가 인천과 육지로 연결된 것은 1906년이다. 1918년 북성지구에서 월미도에 이르는 왕복 2차선 제방둑길이 축조되고, 이후 각종 관광 시설이 들어서면서 경인지역 최대 관광지로 발달하였다.

 

해방후에는 미군의 '해양경비대' 기지가 되어 한국인에 대한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다.

 

6.25전쟁 중에는 인천상륙작전의 첫 상륙지점이 되어 미국 구축함의 첫 포탄이 월미도에 작렬하면서 관광지로 개발되었던 아름다운 풍광은 초토화되어 그 모습을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한국전쟁 후 군부대의 주둔으로 2001년 개방되기까지 약50년 동안 군사기지 역할을 하였다.

 

월미행궁

 

행 궁 (行宮 )이란 왕이 궁궐을 떠나 잠시 머무는 궁을 말한다. 대개 왕이 휴양, 전란시 임시대피를 위해 지방에 설치하였다.

 

청의 침입에 맞서 북벌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던 孝宗(효종)은 강화도로 들어가는 비밀 피난 통로를 두었는데 月尾 행궁도 그 중의 하나이다.

 

1656년 홍명하의 건의로 인천부사 윤부가 비밀리에 지었다. 임금이 뱃길을 따라 인천을 통해 영종을 거쳐 강화로 피난을 할 때 길목에 잠시 머무는 임시 행궁으로 지어졌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다른 행궁에 비해 규모가 상당히 작았다.

 

1695(숙종 21) 행궁이 중건되어 일정 기간 유지되었으며, 북벌론이 수그러들면서 그 기능이 상실되어 조선말인 고종때 헐어버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월미행궁의 터가 어디였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고, 이를 확증할 만한 유물이나 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문헌에서 보이는 행궁의 위치는 '영종진(永宗鎭)의 남쪽 수로 7', '일본 해군 석탄고'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 지도서에 나타난 월미 행궁은 전체가 28칸으로 이루어진 목조 기와 건물이다.

정전 8, 동월랑 4, 서월랑 4, 남월랑 7, 수직간 3, 내중문 1, 외중문 1칸으로 지어졌다.

외전과 내전의 구분 없이 단지 외전인 정전만 있는 격이 낮은 행궁으로 볼 수 있다.

보통의 관아나 객사에서 보이는 단순한 꾸밈새의 소박한 건물로 추정된다.

 

이를 토대로 월미로 행궁의 배치도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 정전 : 조회를 하던 집무실

- 월랑 : 대문 양 쪽에 세워진 긴 행랑

- 여지도서 : 조선 후기에 각읍에서 편찬한 읍지(邑誌)를 모아 책으로 엮은 전국 읍지.

 

월미 돈대

영종지도 돈대가 표기된 부분

현존하는 강화돈대의 전경

돈 대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설치한 방어물로, 성을 쌓기 곤란한 능선이나 계곡, 해안가 등에 작은 규모로 흙이나 돌을 쌓아 만들었다.

 

[영종지도]를 보면 월미도 남서쪽 약 4부 능선에 둥근 원형 모양의 돈대가 있었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 없으며, 현재 돈대로 추정되는 곳에는 여러 채의 군인 막사가 설치되어 있어 이미 훼손된 것으로 생각된다.

 

월미 돈대를 언제 쌓았는지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다. 다만 강화에 설치되어 있는 돈대가 숙종 때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아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월미 돈대는 외국 세력의 접근이 활발하던 조선 후기에는 이들로부터 인천과 강화도의 성을 지키는 군사시설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본해군 석탄고


월미행궁 터로 추정되는 북사면 일대가 일본 해군 석탄고로 무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1885년, 일본은 이 부지를 사들이려다 월미행궁 터이기에 매매가 불가함을 알고는 1888년 조선에 석탄고 터를 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행궁 터가 있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월미도에 다른 나라의 군사시설을 들일 수 없다고 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1891년 조선의 독판교섭통상사무를 맡고 있던 민종묵과 일본의 근둥 대리공사 사이에 임차계약이 체결되면서 이미 일본이 사용하고 있던 월미도 북사면의 4900평을 매년 은화 80냥에 빌려주게 되었다. 이 석탄고는 월미도가 관광지로 본격 개발되면서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양력으로 1891년 1월 12일 일본은 조선정부를 강압하여 일본 해군의 석탄창고 설치를 위한 월미도 기지조차조약을 체결하였다. 월미도 북단의 4,900여평을 연세로 은화 80원에 빌리기로 조약을 맺으면서 일본은 선박급수소까지 설치하였다. 이 지도는 월미도 내에서 석탄고와 그 부대시설을 설치하기 가장 좋은 곳을 미리 조사하여 차입 신청할 때 첨부한 지도이다.

1930년대 인천부에 의해 제작된 월미도와 소월미도의 상세지도이다. 매우 높은 축척을 통해서 월미도의 토지이용 및 건물 용도까지 섬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관광시설 등이 전혀 표시되지 않고 무선전신소, 검역소, 스탠다드석유회사창고, 등대와 같은 행정, 산업시설 위주로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행정자료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의 월미도 토지 이용실태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지도이다.

 

러시아 저탄고

1896년에 일어난 '아관파천'으로 세력이 강화된 러시아는 러시아해군 석탄창고를 지을 수 있는 부지를 월미도에 마련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러시아 공사와 외부대신 이완용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어, 월미도 남서쪽 뒷산 일대 44,316평방미터가 러시아에 조차되었다.

러시아는 음료수 운반을 위해 25칸 가량의 수관을 설치하고, 석탄 적재를 편리하게 하기 위한 약 156칸의 부두를 축조하여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그러나 1904년 러시아와 일본이 팔미도 근해에서 벌인 러,일 전쟁에서 패운이 짙어진 러시아가 군함 코레츠호, 와리야크호와 상선 숭가리호를 소월미도 부근에서 차례로 자폭하는 사건이 있은 후, 러시아의 세력은 급격히 위축되면서 이 석탄고도 운명을 같이 하였다.

 

인천항 부근에 조우한 러,일 양국 군함의 치열한 교전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진이다.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 패권을 노리고 러,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막강한 러시아 극동함대를 상대해야 했다. 치열한 인천 앞바다 해전에서 승리한 일본은 결국 조선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미국 스탠다드 저유창고

 

1882년 미국과의 통상 조약 체결을 시작으로 인천항에는 일본과 청은 물론 독일, 영국, 미국 등의 외국 상사들이 진출하여 무역 경쟁이 치열하였다.

 

그 중에 석유는 전기가 들어오기까지 가정의 필수품으로 일본 상인들이 독점하여 수입하고 있었다. 1895년 미국계 타운젠트 상사는 미국 스탠다드 석유회사와 수입 독점 계약을 맺고는 월미도 동쪽 해안의 터를 사들여 동유(Derosese oil) 50만 상자를 저장할 수 있는 석유 저장 창고를 지었다.

 

인천부내도(仁川附內都에 표시된 스탠다드 석유회사 저유창고(1925)

이 석유는 송함(松函)석유란 간판을 붙이고는 이미 판매망을 확보한 일본 상인을 통하여 전국으로 독점 판매되었다.

이러한 독점 판매는 1903년 화란과 영국 등지에서 석유가 수입되면서 무너지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큰 몫으로 석유 시장을 장악하여 많은 이익을 남겼다.

 

,일전쟁 이후 상권이 점차 일본으로 이동하면서 조선을 떠날 때까지 이들에 의한 경제적 침투는 조선의 자주적인 경제 발전을 저지하는데 결정저인 요인이 되었다.

 

월미도 무선 전신소

 

인편(사람)으로 전달되는 통신 수단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이 전보의 시작이다.

 

1885년 첫 전보가 한성과 제물포간에 연결된 후, 1894년에는 정식으로 전신 사무를 관장하는 전보사가 서울을 중심으로 각 주요 도시에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인천에도 우체사가 1895년 외리(현 중구 정동)에 설치되어 전신업무를 관장하였다.

한편 무선 전신은 1910년 월미도에 무선 전신소가 세워지면서 시작되었다.

 

비록 일반 대중의 전보는 취급하지 못하고 군사적으로 이용되는데 불과했지만, 월미도 무선 전신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소라는데 의미가 있다.

 

1923년 인천 무선 전신국이 문을 연 데 이어, 2년 뒤 경성무선 전신국이 확장 되면서 월미도 무선 전신소는 폐쇄 되었다. 그후 1932년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

 

인천 임해 학교

 

1923년 월미도 북쪽 해수욕장에는 여름 임해학교가 문을 열었다.

임해학교의 소속선인 임해환 두척이 완성되어 성대히 진수식을 거행할 정도로 성황리에 진행이 되었다.애국부인회 인천지부, 간호부인회 인천지부 사업부가 중심이 되고 인천 교육회가 후원하였다.2층으로 지은 서양식 건물로 경인 지역의 많은 청소년을 수용하여 수영 및 모래욕, 운동, 자유 연구, 학예발표, 오락 등을 진행하였다.수영장, 텐트, 흑판, 탁자, 식기 등의 시설을 갖추고 학교의 학생들이 단체로 들어와 체제 유지에 필요한 규율과 정신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월미도 임해 학교 건물(1920년대 말)

월미도 임해학교는 애국부인회 인천지부와 간호부인회 인천지부, 그리고 일부 독지가들의 후원으로 1923년부터 하계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40일간 개교하였다.사진에 보이는 건물은 임해학교의 교사로 2층 건물에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고 한다.

 

월미도 전상에서 내려다본 월미도 유원지 전경(1930년대)

월미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월미도 유원지 일대의 전경을 잡은 사진이다. 이 사진은 인천 관광명소를 소개하는 기념엽서에 수록되었다. 임해학교, 조탕 건물을 비롯한 월미도 유원시설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그린 아름다운 풍경화를 연상케하는 사진이다.

 

월미도 공설 운동장

 

개항과 함께 인천을 통해 세계 여러 문물이 들어오면서, 월미도 공설운동장과 웃터골 운동장은 서양 체육이 활발히 보급되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월미도 공설 운동장은 인천부청에서 1천여원의 예산을 들여 19238월 초에 완공한 체육시설이다. 월미도 북쪽의 움푹 파인 위치 약 35백 평의 땅을 정비하여 정구코트, 야구장, 기계 체조장, 각종 운동기구 등을 설비하여 널리 일반의 운동장으로 사용되었다.

 

개장식도 성대히 진행되어 인천 교육회 주최로 정구대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여름철이면 각종 정구, 수영, 씨름대회 등이 열렸다.

 

 

월미도 녹원(사슴농장)

 

평탄한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는 북쪽 해안을 끼고 발달된 여러 관광 시설과 더불어, 경사진 남쪽 해안에는 사슴농장이 조성되었다. 한적하고 조용한 땅에 목책을 두르고는 수십 마리의 사슴과 원숭이를 방목하여 일반 관람객을 즐겁게 하였다고 한다. [매일일보] 1929426일자에 "월미도에 사슴을 방목" 하였다는 기사와, 921일자에 "월미도의 명물 사슴을 쏘아 죽여 인천부에서 사살자를 고발"하였다는 기사에서 개장 당시의 모습을 조금은 엿볼 수 있다.

 

193045일자 [동아일보]에는 인천부청 회의실에서 열린 인천부협의회 기사가 실려있다.

 

시내의 도로 개설과 같은 긴급한 시설은 등한히 한 채 인천 사람들의 생활에 불편이 없는 월미도 공원의 사슴 구입비 1200원이 계상되어 문제가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한 찬반으로 혼전을 거듭하다가 600원으로 감액되었다는 사실로 보아 과다한 투자로 반발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월미도 녹원의 사슴구경 (1930년대)

월미도 유원주식회사에서 운영하였던 임대 별장의 일부 모습이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조화된 근대적 유원시설이 잘 갖추어져 첨단의 관광명소로 이름을 펼쳤던 월미도였던 만큼 이곳에는 상류층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들었을 것이다. 임대 별장은 그들을 위한 건물이었다.

 

그린비치

1950년 9월 15일 새벽에 진행된 인천상륙작전은 국제연합(UN)군이 맥아더의 지휘아래 인천 월미도에 상륙하여 6.25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역사적인 군사작전이었다. 하지만 이 작전으로 월미산의 아름다운 풍경은 초토화되어 옛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로부터 2001년 다시 개방되기까지 반세기 동안은 월미산은 군사기지로 엄격한 통제 제한구역이 되었다.

9월 15일 새벽, 미 구축함의 첫 포탄이 월미도에 작렬하였고, 그후 연이은 폭격으로 미군 제5해병연대 제3대대 상륙단의 선수 공격대는 월미도 해안 그린비치에 상륙하였다.

 

한국 해병 4개 대대, 미국 제7보병사단, 제1해병사단은 전격공격을 감행하여 인천을 점령하고 김포비행장과 수원을 확보함으로써 인천지역을 완전히 수중에 넣었다. 이어서 19일 한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하여 26일 정오에는 중앙청에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계양함으로써 작전을 끝냈다.

 

미국잡지 『라이프(Life)』지에 실린 인천상륙작전 진행도이다.
이 한장의 사진을 통해 보더라도 월미도가 집중적인 포격의 대상이었는지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린비치에 정박한 연합군 함대의 모습과 월미도에서 인천시가를 향해 불뿜는 화기, 레드비치를 향해 질주하는 척후선들의 모습에서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