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속 개항기 인천-(2)‘조선신보’-‘조선신문’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8-25 01:01:24
제호 바꾸며 1941년 초까지 발행
문헌 속 개항기 인천-(2)‘조선신보’-‘조선신문’
인천은 외국의 문물이 들어오는 관문이었기에 일본인들이 일찍부터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한 도시다 일본인들은 서울보다 먼저 신문을 발행하여 한때는 몇 개 신문이 자리잡기도 했었다.
조선에서 일본인들이 최초로 신문을 발행한 도시는 부산이다. 일본 거류민들의 재부산상법회의소가 1881년 12월10일부터 ‘조선신보’라는 순간(旬刊) 신문을 창간하여 약 6개월간 발간한 것이다. 인천에서 발행된 『조선신보』와 명칭은 같지만 별개의 신문이었다.
인천에서는 1890년 1월28일에 일인들이 ‘인천경성격주상보’라는 신문을 발간하기 시작하여 조선신보-조선신문 등으로 제호를 바꾸며 1919년 말까지 인천에서 자리잡고 있었다.
인천은 일본과 서양의 문물이 조선에 유입되는 첫 관문이면서, 한말부터 일제기간을 거치는 기간의 신문발달사에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지역이었던 것이다.
인천에서 일본인들이 일본어로 신문을 창간한 시기에는 한성주보가 폐간되어 아무런 신문도 발행되지 않고 있던 때였다. 인천은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상업적 목적에서 신문이 필요의 필요성도 있었지만 일본의 조선 진출에 신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인식도 있었다.
신문은 독자와 광고의 많고 적음이 그 존립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인천은 일본인 거주자도 늘어나고 있었고, 조선에 진출하는 상품의 광고도 다양했다. 서울과의 지리적 근접성 때문에 수입과 수출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기도 했다. 일인들의 신문 발행에 인천은 적절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신문은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신문 가운데는 52년이라는 가장 긴 연륜을 쌓았다. 이 신문의 역사는 인천에서 발간되던 시기와 서울에서 발간되던 시기의 2기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는 1890년 1월에 창간되어 격주, 순간, 주간, 격일간, 일간으로 발전하면서 1919년 12월18일까지 19년에 걸친 기간이다. 제2기는 서울로 본사를 옮겨 사세를 확장하면서 조선의 일본어 신문 중 경성일보와 쌍벽을 이루다가 폐간된 1941년 2월말까지이다.
조선신문이 본사를 서울로 옮긴 가장 큰 이유는 ‘상보’가 창간되던 때와 비교해 신문 발행의 환경이 크게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간 무렵 인천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상업적인 전진기지 성격을 띄고 있었고, 일본인 거주자가 서울보다 많았지만 1919년 말에는 서울이 식민통치의 확고한 중심이 되어 있었다.
제호와 발행 기간도 수차례 변화를 겪었다. 『인천경성격주상보』(월 2회)에서 『조선순보』(월 3회)→『조선신보』(주간)→『조선신문』(격일간에서 일간)으로 바뀌고 연중무휴 발행에 조석간 발행으로 발전했다. 반세기가 넘는 긴 발행기간의 지면이 모두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교적 많은 지면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신문이 발간된 기간의 역사와 일제의 침략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화도진도서관은 지난해 12월 조선신보 지면을 디지털 자료로 제작했고, 올해 5월에는 영인본으로 출판했다.
조선신보 지면은 인천학 연구자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인천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개항이래 일제 식민지 시기의 포괄적인 역사 연구에도 중요한 1차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디지털로 제작된 지면은 1906년 9월부터 1921년 3월까지 인천에서 발행되다가 서울로 이전한 직후까지다.
해제=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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