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예문
인천의문화/인천의문화재
2009-01-27 16:05:49
신인천문화유산답사기 l 홍예문
아픈 역사 품고 있는 무지개 돌문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 마루턱에 오르면 세월의 이끼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돌문과 마주한다. 윗머리가 무지개 형상을 한 문이라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것이 홍예문(虹霓門)이 되었다.
예쁜 이름에 걸맞게 담쟁이 넝쿨로 아름다운 모습을 띠고 있지만 홍예문이 건립된 배경에는 구한말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가 숨겨져 있다. 1883년 인천이 개항되자 일본과 청국을 비롯한 구미 각 국은 지금의 중앙동, 북성동 일대에 외국인이 거주하는 자치 지역인 조계(租界)를 설정했다.
일본은 중앙동, 신생동, 신포동 일대에 터를 잡은 후 일본 거류민이 급격히 늘어나자 만석동 방면으로 그 영역을 넓혀갔다. 그 당시는 해안선 쪽으로 난 길이 여의치 않았다. 양쪽을 오고가려면 용동 마루턱 쪽으로 돌아서 가야하기 때문에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었다. 중앙동이나 내동 방면에서 화평동이나 만석동 쪽으로 질러가려면 이곳을 통과하는 것이 편리했다. 또한 일본조계에서 경인철도의 축현역(현 동인천역 부근)으로 우마차를 이용해 물건을 쉽게 옮길 수 있는 지름길로도 적당했다.
결국 일본인들은 응봉산 산허리를 잘라 문을 내게 된다.
1905년 일본 공병대가 공사를 시작했는데 거대한 암석이 앞을 가로막는 등 난공사를 한 끝에 3년이 지난 1908년에 완성했다. 높이 13m 폭 6.7m의 화강석과 벽돌을 혼용해서 만든 아치 구조물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건축물이었다.
일본인이 설계와 감독을 맡았고 중국의 석수장이들과 한국인 노무자들이 건설에 참여했다. 공사비는 총 3만2,250원으로 한국정부가 1만6,800원, 일본거류민단이 1만5,000원 등 한국정부와 일본인들이 거의 반반씩 비용을 부담했다.
홍예문은 한때 인천의 풍광을 갈라놓았다. 북쪽의 송현동, 화수동의 허름한 집들과 남쪽 송학동, 중앙동 쪽의 이국풍 저택들이 대비감을 주었다. 항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시원한 골바람이 불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최근에는 고풍스러운 건축물을 배경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의 단골 촬영장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찾아가는 길 _ 동인천역에서 대한서림 옆으로 난 자유공원길을 따라 오르면 인성여고 가는 길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가면 돌로 된 문을 통과할 수 있다.
글 유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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