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국을 찾는 華僑
仁川愛/인천이야기
2009-02-19 14:43:55
한중수교 이후 ‘新화교’ 정착
세계경제의 핵 화교-23) 다시 한국을 찾는 華僑
사회적·경제적 차별 정책을 비롯한 어려움으로 우리나라에서 화교들이 살아가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한국 화교들은 미국, 대만 등의 또 다른 나라로 떠나는 길을 택해야 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화교들은 한국이 싫어서 떠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 화교들은 그 지역 화교 사회에 융화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차이나타운이 아닌 코리아타운에 속한다는 것이다.
한국 화교도 기본적으로 중국인이고 화교학교를 통해 중국의 문화를 배우며 자라왔다. 게다가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한국에서 차별받아 떠나온 처지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차이나타운에서 같은 중국계 사람들과 어울릴 것만 같다. 하지만 한국 화교를 생각할 때는 조금 더 생각을 해야 한다.
일단 한국 화교들과 다른 화교들은 중국계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문화 차이도 크고 서로 교류도 별로 없는 편이다. 거의 모든 차이나타운에서 사용하는 보편적인 언어는 광둥어이지만 산둥성에서 온 한국 화교들은 의사소통이 쉽지 않았다. 또 한국 화교들이 한국에 정착한지 오랜시간이 흘렀던 것이다.
한국 화교들은 많은 부분 한국 문화에 동화되어 다른 화교들 보다 한국인의 사회에 더 많은 문화적인 동질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 화교들은 스스로를 한화(韓華)라고 부르고 뭉치게 되었다.
한국 화교들은 우리나라를 완전히 등지고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세계 이곳저곳으로 떠난 한국 화교들은 한화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다.
또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 화교의 지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로 인한 어려움을 화교 자본을 비롯한 외국 자본의 유치로 극복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교에 대한 나라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1999년에는 토지소유제한 규정이 풀리는 등 각종 규제 및 차별적인 제한들이 완화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5년에 개최된 세계화상대회로 화교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개선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인천, 서울 등지에 차이나타운을 새로 건설하는 등의 사업도 계속 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도 차별적인 제도의 잔재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비교적 나아진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자 화교들이 다시 우리나라를 찾게 된 것이다.
특히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새롭게 중국에서 온 화교들을 기존에 한국에 머물던 화교와 구분하여 신화교라고 부른다. 신화교들은 대부분 대기업 사원, 전문직, 사업가 등의 엘리트들과 유학생들로 이루어져있다. 그들의 숫자는 날로 늘어 그 수는 이미 구화교의 5배에 이르렀다.
이렇게 날로 증가하는 한국 화교들은 세계 속에서 정치, 금융, 첨단기술 등의 전문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또 한국 화교들은 중국, 동남아시아에 영화, 드라마, 게임 등의 매체를 수출하여 한류와 우리나라 경제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8억3천만 달러 화교자본 유치
제8차 세계화상대회
‘국경을 모르는 세계 3위의 경제 세력’ ‘세계 제 2위의 민족상권’.
바로 화교자본의 현 위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이 화교자본을 쥐고 있는 것이 화상인 것이다. 전 세계에 퍼져있는 이들은 2년에 한 번 씩 한자리에 모인다. 바로 세계화상대회가 열릴 때이다. 많은 화교 네트워크가 있지만 가장 영향력 있고 주목받는 화교 네트워크는 바로 세계화상대회이다. 처음 리콴유(李光耀)가 싱가포르에서 세계화상대회를 주도했을 때는 세계 곳곳의 화상들이 모이는 사교모임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세계 각국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화교자본을 쥐고 있는 세계 화상이 모이는 것만으로도 화교자본의 흐름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회가 열리는 곳에 화교자본이 모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나라들이 서로 자기 나라에 세계화상대회를 유치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2005년 제8차 세계화상대회가 우리나라에서 개최되었다.
사실 우리나라는 세계화상대회를 유치하는데 유리한 나라가 아니었다. 우리나라 화교 인구가 적을 뿐 만 아니라 화교들 사이에서도 우리나라의 이미지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화교단체의 협력에 힘입어 경쟁국이었던 일본과 필리핀을 제치고 유치할 수 있었다.
제8차 세계화상대회는 ‘전 세계 28개국의 2천500여명의 중국계 기업인과 500여명의 국내 기업인이 참석한 가운데 2005년 10월10일부터 12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개최됐다.
이 대회는 참여인원이나 규모면에서 중국의 난징에서 있었던 제 6차 대회를 제외하고는 최대 성황이었다. 또한 8억3천만 달러의 화교자본을 유치하고 5억8천만 달러의 수출효과를 얻었다. 게다가 화상(華商)과 한상(韓商) 사이의 네트워크 또한 구축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한편에서는 아쉬움의 소리도 있었다. 허치슨왐포아(Hutchison Whampoa)와 청콩홀딩스(Cheung Kong Holdings)의 리카싱(李嘉誠) 회장, 순훙카이 프로퍼티스(新鴻基地産展)의 궈빙샹(郭炳湘) 형제 등 대표적인 화상 거부가 대거 빠진 데다 실질적인 투자협상이 이뤄지기보다는 화교의 정기적인 친선모임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경제적 효과도 기대 이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세계화상대회를 개최하기에 열악한 환경이었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제8차 세계화상대회는 성공적으로 치러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씻은 것은 화교들이 꽌시(關係)를 중시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무엇보다 값진 성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화상대회 유치는 우리나라 화교역사에 있어서 새 출발이라 할 수 있다.
첫 술에 배부르랴! 세계화상대회 유치는 끝났지만 화교자본의 유치는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박정동 인천대 중국학연구소 소장·이승훈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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