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삼치골목-동인천-주머니 옹색한 문인들에 입소문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09-05-01 21:05:27
주머니 옹색한 문인들에 입소문
(16)삼치골목
중구 전동, 옛 축현학교 뒤쪽 일대에 삼치집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 정확히 언제인지 모르겠다. 하고 많은 생선 중에 하필이면 왜, 삼치가 상품의 주종이 됐는지도 모르겠고, 또 이곳은 바다와 사뭇 거리가 있고, 신포동 생선전(生鮮廛)과도 떨어져 있는, 생선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내륙(內陸)(?)인데 어떻게 삼치가 상륙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을 뒤져보면, 아마 1980년쯤부터인가, 얼마 전까지 마을금고가 있었던 건물 옆 대화양조장으로 들어가는 골목 안 오른쪽 한 일본식 가옥에? 인천에 흔한 값싼 생선들을 막걸리, 소주 안주로 구워냈었는데 그것이 원 시초였던 것 같다. 물론 그때는 고등어나 갈치, 조기 따위가 주로 입맛을 돋우었다. 가끔 내놓는 삼치는 익숙하지 않아 가난한 입에도 설었었다.
아무튼 그 술집은, 원래 주인이 살던 가정집이었는데 아침이면 방의 이부자리를 걷고 세간을 덮어 그대로 술청으로 사용했다. 그 일대가 일제 때 일본인 마을이었던 까닭에 그 집도 일본식 가옥으로 남아 있었는데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에 잔디가 있었다. 술손님은 주인이 안내하는 대로 이 방 저 방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 것이다.
지금도 대체로 주머니가 옹색한 사람들이 문인이지만, 그 당시 우리 인천의 문인들은 더욱 빈한해서, 그나마 교사직에 있는 몇 사람의 윤택한(?) 주머니에 의지해 저녁마다 한 잔의 황혼을 마시고는 했다. 물론 생선 나부랭이가 지천인 신포동과 시장 언저리 일대 선술집에서였다.
그러다가 여기 생선집이 입소문을 타고 번지면서 우리의 발길을 잡아끈 것이다. 그때가 바로 80년대가 시작될 초기였다. 처음 동행은 작고하신 소설가 심창화(沈昌化), 화가 우문국(禹文國) 선생, 고 김영일(金英一) 화백 등이었다. 제일 나이가 어려 말석에서 생선 가시를 발라내던 생각이 난다.
그 후로도 몇 번, 그 무렵 타계하신 최병구(崔炳九) 시인, 또 그와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고 손설향(孫雪鄕) 시인, 화가의 꿈도 펼치지 못한 채 일찍 떠난 김영수(金永洙)군 등과 해가 지기를 기다려 이 집을 방문하고는 했다.
그러나 거기 출입이 그다지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여느 술집들보다 안주 값이 눅은 것에는 크게 호감을 두었지만, 신포동보다는 아무래도 바닥이 낯선 데다가, 한 집에서 잔을 놓지 않고, 으레 2차 3차 순례하는 고약한 습속이 밴 예술인들이어서, 동떨어져 혼자 앉은 외진 이 집을 여간 불편해 한 것이 아니었다.
그 후 모두들 신포동으로 철수하고 이쪽에 대해서는 무관하게 지냈다. 거의 그쪽은 넘어가지도 않은 채 신포동에서만 오물오물 모여 지냈는데 십 년 전인지, 이십 년 전인지 한 집, 두 집 생선집들, 삼치집들이 생겨나 거리를 이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은 본바닥 인천의 명소로 발전했다. 최근에는 관에서도 관심을 가져 가지런히 외양들을 정비하여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인천이 정녕 인천다우려면 이런 골목이 있어야 한다. 비린내도 풍기고 사람 목소리도 들리는 그런 인천 거리! 옛날처럼 다시 문화인, 예술인들이 모일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혼자 지나가는 이 거리가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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