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 속에 묻힌 선조의 자취
仁川愛/인천사람들의 생각
2009-05-04 18:47:35
망각 속에 묻힌 선조의 자취 |
김양수(문학평론가) |
인천시립박물관 앞마당에 놓여있는 <고인돌 무덤(支石墓)> 덮개돌을 본 초등학생이 집에 가서 부모에게 <고인돌 무덤>의 유래를 물었다. 그것이 선사시대 부족 수장의 무덤이라고만 알고 있을 뿐이지 그 상세한 유래나 역사적 지식을 배운 바 없는 부모는 하는 수 없이 초등학생인 아들에게 설명해주기 위해 우리나라 유수의 출판사에서 1980년대 초에 간행한 대백과사전을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모든 궁금한 대상들을 상세하게 밝혀주게 돼 있는 그 대백과사전에서도 신통한 지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고인돌> 항목에는 ‘선사시대의 유물로 납짝하고 넓찍한 돌을 양편에 세우고 평평한 돌 한 장을 얹은 분묘(支石墓)’라고 기재해 놓았으며 또 <지석묘> 항목에는 ‘중국 동북의 남동부에서 한국, 일본 큐슈에 걸쳐서 분포하는 분묘의 일종(고인돌)’이라고 해놓고 있어서 부모로서 초등생 아들에게 설명해 주기엔 너무 구름잡는 식의 소개문인 것이다. 이보다 <돌멘>이라는 항목에 조금 더 설명을 펼쳐놓고 있기는 했지만 부모가 초등생에게 설명해 주기엔 역부족의 풀이글이었다. 도대체 대백과사전이라는 방대한 책속에 <고인돌 무덤>이라고 하는 항목이 어찌해서 이렇게밖에 기재될 수가 없었나 하는 그 학부모의 고충담을 듣고서 생각을 해보니 그 대백과사전이 간행된 시기가 1980년대 초기라는 데 주목하게 됐다. 그 시절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고고학계에 <고인돌 무덤>에 관한 광범위한 연구논문을 담은 서적들이 일반인들의 눈에 쉽게 띄게 나와있지 않은 데서 온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가령, 강화(江華)의 하점면 부근리 317번지 고인돌 무덤이 1964년 국가사적 137호로 지정돼 보존이 되고 있기는 했으나 선문대학교의 이형구 고고학 교수가 ‘강화도 고인돌 무덤 조사연구’라는 연구논문 서적을 발간하기 전까지는 너무나 유명한 고인돌 무덤으로 알려져오고 있으면서도 그때까지 전문적인 조사보고서나 연구서가 거의 없다시피 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대백과사전에 고인돌 무덤에 대한 상세한 해설이 실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이 된다. 고인돌 무덤은 선사시대 청동기문화 시대의 부족 수장(首長)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고대사회의 대표적인 묘제의 하나로 청동기시대 동북아시아 일대의 인류들이 즐겨 사용해온 돌무덤(支墓)인 것이다. 돌무덤은 북방식과 남방식의 두 가지로 분류되고 있는데 중국 동북지방인 만주 동남지역과 한반도의 서북부인 평안도, 황해도를 거쳐 경기도 파주지역과 강화도, 인천시 서구 일부와 원인천 지역인 문학산, 주안 사미 일대에서도 발견됐고 특히, 강화에는 부근리 고인돌 무덤을 대표로 해 160기나 되는 고인돌 무덤 군(群)이 산재해 있음이 앞의 이형구 교수의 지표조사와 측량활동에서 밝혀졌다. 우리나라 국토에는 앞의 지역만이 아니라 함경도를 위시해 전국토에 무려 1만 기가 넘는 고인돌 무덤이 널려있어 세계 제일의 숫자를 기록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며 청동기시대라고 하는 시기가 기원전 3천 년을 기점으로 하는 것이라고 볼 때 그 시기는 단군 조선이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면서 우리 국토에 그 시기 초기 국가사회가 형성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취인 것이다. 신화와 전설로서의 단군 조선이 아니고 실제 국가사회로서의 존재를 알려주는 자취이고 그 자료인 것이다. 이 고인돌 무덤이 강화에 유독 대량으로 산재하고 있는 것은 강화가 그만치 중요한 지역적 특성을 지닌 요새라는 이유에서 오는 것이겠으나 또 하나는 섬이라고 하는 교통의 격리지역이라는 이점에서도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인천 지역의 경우, 문학산 일대나 학익동, 주안 일부지역에서 극소수일 망정 고인돌 무덤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더 많은 수효의 고인돌 무덤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드는 바이지만 교통왕래가 많고 보니 훼손, 소실되는 불운에 처해졌을 것이다. 1971년경 박광성 교수와 내가 문학 지석묘와 주안 지석묘가 원위치에서 밀려나게 돼 당시 노창현 인천부시장에게 건의해 수봉공원으로 옮겨 보존해 왔는데 어느 때쯤인지 느닷없이 남구 노인회관 야외마당으로 쫓겨나와 있는 것을 지난 연말에야 알게 됐다. 시립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놓는 것이 정도이겠으나 장소가 마련되지 못하면 차라리 문학산 어느 지역을 새로 확정해 자리 잡게 해야 한다. 다음으로 서구 가현산 대곡동 고인돌 무덤 군(群)도 규모있게 손질해 각급 학생들이 소풍철에 찾아가서 배우는 야외학습장으로 마련했으면 좋을 것이다. 까마득한 역사의 새벽, 선조의 자취를 회상하며 망각에 묻힌 숨결을 느껴 가짐이 좋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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