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보존 바로하기
仁川愛/인천사람들의 생각
2009-05-04 18:44:46
문화재 보존 바로하기
지금 60대 이상 되는 사람으로 어린 시절을 인천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옛 인천의 지명(땅이름) 가운데 향수에 젖을 만한 것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883년 인천이 근대적인 개항을 한 이후 개항장을 중심으로 몰려드는 근대문물의 수용으로 이제까지와는 다른 낯선 인천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비록, 어거지로 밀고 들어온 일본세력에 의해 피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기는 한 것이지만 이제까지와는 다른 문물을 안고 살아가게 된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생활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인천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지역도 조금씩 달라져가고 있었다.
우선, 우리 사람들이 활동하며 왕래하는 거리 이름도 새로 불리게 됐다. 가령, 지금의 중구 경동네거리의 이름이 <싸리재>로 통칭됐는가 하면, 거기서 송림동으로 빠지는 철로문 일대를 <배다리>라 했고 또 거기서 동인천역을 향해 나가는 길을 채미전(참외전)거리라고 했다. 또 경동네거리에서 신흥동으로 빠지는 답동성당 뒷켠과 시립도서관으로 올라가는 입구의 길을 <긴 담 모퉁이>라고 했다.
지난 세기 시민들에게 애칭되다시피 했던 이 거리의 지명들을 망각의 추억 속으로 사라져가게 하기보다는 오래도록 보존될 수 있는 애칭으로 남도록 유허비를 세웠으면 한다. 인천의 중구지대는 역사의 발자취가 새롭게 새겨진 곳이다. 개항 후 30년이 채 안 돼 일본에게 주인자리를 빼았기고 더부살이를 하는 시기가 있었는가 하면 다시, 36년 만에 주인자리를 되찾아 본격적으로 인천을 이끌어가게 됐는가 하면 초기에는 광복 직후의 혼란기를 겪은 다음, 6·25 북한공산군에 의한 불법침략을 받아 나라가 백척간두에 놓이는 시련도 겪었고 4·19와 5·16을 거쳐 오늘의 큰 인천으로 발전을 해왔는데 아직도 이곳저곳 아쉬운 흔적들이 눈에 띄는 것도 남아있어 넋두리를 해보는 것이다.
중앙동과 선린동을 경계짓는 옛 청국지계와 일본지계의 경계석 계단이 자유공원으로부터 연안동 큰 길로 내려오는 서남쪽 내리막 계단은 인천시문화재(기념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계단이 어울리지 않는 대상물과 군더더기로 오히려 분위기를 무겁게 억누르고 있다. 어울리지 않는 대상물이란 중국인 거리가 관광특구로 지정된 것을 기념해 중국에서 직접 공자상을 보내와 계단석 윗쪽에 좌정시켜 놓았는데 계단 중앙부에 앉혀놓은 공자상이 계단석 전체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무거운 데다 계단 상층 중앙부를 차지하고 있어 억압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굳이 그곳에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면 중앙부가 아니라 모서리쪽으로 옮겨 놓는다면 공자상과 경계 계단석 분위기도 자연스러움을 주어 살릴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두 번째 꼴불견은 양쪽에 두 줄로 세워놓은 양국의 석등이다. 중국쪽으로 중국전통 석등을 한 줄로 세웠고, 거기 맞추어 나란히 일본전통 석등을 세워놓은 것이다. 이 석등들이 계단석이 조성된 그 시절부터 있었던 것이면 몰라도 그것을 굳이 오늘에 와서 새로 해 세웠다는 것은 실로 넌센스에 지나지 않으며 기존 문화재를 훼손하는 것이다. 경계 계단석은 그것들 때문에 물에 뜬 기름을 보는 듯한 안타까움을 안겨주고 있다.
문화재를 보호, 보존하는 일은 없던 것을 덧붙여서 망쳐놓는 일이 돼서는 안 된다. 옛 것을 그대로 손대거나 덧붙이지 않고 보존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중구 관내에는 개항시대와 관련된 문화재가 꽤 있는 편이다.그런데 그것들을 어떻게 보호, 보존하는가 하는 일이 중요한 일이다. 용동 신신예식장 쪽에서 용동 큰우물 방향으로 내려가는 계단 중에 <용동 권번>이라고 새겨진 계단석이 있다. 그 곁에 지금은 사라진 <용동 권번>터가 엄존하고 있다. <권번>이란 개항기 때의 기생학교로 <평양 권번>, <한성 권번>과 함께 그 시절에 드날렸던 기생양성소이면서 접대여성 운영기관이었던 것이다. 유명한 판소리 보유자가 그곳에서 나왔고 초기 대중가요 가수인 이화자가 그곳 출신이며 한국 연극계 초기 개척자인 <토월회> 출신 복혜숙 여사가 일시적이나마 그곳에서 몸을 의탁한 일도 있었다. 그러므로 한 시대 여성의 특수조직체였던 권번의 표지석을 뽑아다 시립박물관에 보존할 필요가 있다.
이와는 또 다른 것으로 용현동 낙섬(원도) 바위 곁에 있었던 사당을 복원해 당시 인천부사가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바다를 건너가는 뱃길 여행과 어민들의 고기잡이 풍어를 비는 사당이 있었다. 그러므로 축제행사를 재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낙섬 바위 일부가 그 근처 어느 음식점 마당에 방치돼 있는 것을 남구청 공무원이 보고 왔다고 들은 바 있는데 그것을 찾아내 경인방송 근방에다 사당과 정자를 짓고 인천시민의 날 서두를 사당제로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인천에 전래된 전통행사를 복원하는 일이 인천사랑의 기본이 된다고 보아 건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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