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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잘못 세워졌던 개항탑

by 형과니 2023. 5. 26.

잘못 세워졌던 개항탑

2009-05-20 09:51:10


잘못 세워졌던 개항탑

 

10여 년 전 부평에 있는 <이이공원묘>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자리를 함께 할 수 있었던 서울대

박물관장을 지낸 임효제 교수에게서 서구 대곡동 고인돌지대를 세밀하게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권유를 받고 그무렵 인천시내 중·고등학교 역사, 지리담당 교사들의 모임의 대표자리를 잠정적으로

맡고 있었던 터라 강화 고인돌을 연구해 온 이형구 교수까지 초청해 시청에서 버스 한 대를 동원케 해서

찾아갔다.

 

적어도 60개는 될 듯한 고인돌 무더기를 대할 수 있었는데 산 아래 동네 사람들이 고인돌에

대한 식견이 없었던 관계로 거개가 잘게 깨진 채로 훼손돼 있었다. 낙심천만이었으나 동네 노인 한 분에게

물어 거기서 약간 떨어진 장소에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거대한 형태의 고인돌이

의젓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 곁에 다가가서 일행은 안도의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형구 교수와 우리

일행은 그 거대한 돌덩어리를 3천 년 전 인간들이 무슨 기술로 그 산중턱까지 그렇게 끌어올려 놓았는지

신기하다는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산을 내려와 귀가길에 올랐다.

 

하기는 중동 레바논에 있는 기원전 3천 년 경의 페니키아인이 축성하고 후에 로마에게 정복된 고대

펄비크 유적에는 높이 27m 폭 4.2X4.9m가 되는 2천 t 무게의 괴석이 모래판에 육중하게 내던져 있는 것이다.

신전을 지으려다 너무 커서 처치곤란이 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돼 내팽개쳐진 것 같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큰 괴석을 어떻게 무슨 장비로 그곳까지 끌고왔는지 짐작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시절에 지금과

같은 기중기가 있었을 리 없고 또한 헬리콥터로도 들어올릴 수 없는 돌들을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옮겨왔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피라미드는 너무나 유명한 것이지만 기념물의 가치를 지닌 대상물은 우리 사적과 유물 가운데도 허다하게

있음을 보아왔다. 그런데 역사의 발자취 속에는 그 유물이 반드시 우리의 기념물일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있다. 가령, 송파구의 <삼전도비>와 같은 것은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한 것을 기념한 청나라를

위한 비석인 만큼 우리에게는 치욕의 대상인지라 광복후 한때 쓰러트려 땅에 묻어버린 일이 있었으나

욕된 기념물도 역사의 흔적이고 오히려 교훈적 가치가 있다는 역사학계의 의견에 의해 다시 파내어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므로 역사의 발자취는 보존시키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며칠 전 모 중앙일간지에 인천개항 100주년 기념탑을 교통혼잡 지대에 세웠다는 이유와 개항이 외세의

강요로 한 것이라서 기념해 탑을 세우는 것이 못마땅하다고 해서 헐어버린 것은 잘못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그 이유로 일본도 미국의 강요로 개항을 했으나 그것이 마지못해 한 것이라는 비문과 함께 그것이 근대화의

계기가 됐다는 분발의 표지가 세워져 오히려 일본의 오늘을 있게 한 번영의 분기점 구실을 했음을

지적하면서 인천의 개항기념탑 파괴는 너무 단순한 충동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해 놓았다.

 

물론, 그 같은 일면적 논리로 말한다면 그 지적이 타당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직선적인 논리로만

판단할 것이 아니라 이 경우는 종합적인 상황판단이 필요하다고 본다.


인천개항 100주년을 맞아 기념탑을 세우게 된 것은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하고 2년이 지났을 때였다.

서울특별시 부시장으로 재직하다가 인천시장이 된 분은 개항 100년을 축하하고 싶었던 것이다.

기념탑을 세우겠으니 동의해 달라고 당시의 정책자문위원회에 알려왔다. 그 때는 지방자치제가 실시되지

않은 때라 정식 의결권은 없으나 정책자문위원회에 형식적이나마 동의를 구해온 것이다.

위원회의 구성은 학계, 교육계, 언론계, 문화 체육계를 대표하는 중추적 인물들로 구성돼 있었다.

개항을 기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일부 반대가 있었으나 그것이 근대적인 출발의 계기가 됐다는 점을

인정해 시장의 원안대로 연안부두 입구 네거리에 거대한 개선문 식으로 세울 것이 아니라 자유공원

한 켠에 조그맣게 표지석으로 세우든지 그 당시 박물관이 임시건물이었던 만치 차라리 기념으로

인천시립박물관 건물을 세우는 것이 좋다고 동의했다. 그러자 시 기획관리실장에게서 결의를 해달라는

요청이 있어 위원회 이름으로 결의까지 해보냈다.

그리고 몇 달 후 정책자문회의 결의와는 달리 원안대로 연안대로 연안부두 입구 네거리에다 거대하게

개선문 식으로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개항기념탑을 세웠고 기념탑 위의 복판에는 인천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여신상>을 해세워 놓았다. 뜻있는 시민들이 그것을 좋다고 하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이미 해세운 것을 부수는 것을 찬성하는 편은 아니지만 애초에 잘못 세워진 것만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