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장기 말살과 인천사람 이길용
仁川愛/인배회
2009-08-17 22:25:25
언론·체육인이자 항일 애국자
(31)일장기 말살과 인천사람 이길용
8월에는 15일 광복절, 국경일과 더불어 우리 가슴을 뛰게 하는 의미있는 날이 또 있다. 8월9일과 25일이다. 그러니까 9일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孫基禎) 선수와 남승룡(南昇龍) 선수가 당당 마라톤 우승과 3위를 차지해 철각(鐵脚) 한국 남아의 기개를 만방에 떨친 날이요, 25일은 보름 늦게 이 장거를 전하던 동아일보가 아사히신문 사진을 인용하면서 손기정의 옷가슴 부분에 달린 일장기를 지워서 내보낸, 소위 ‘일장기말살사건’을 일으킨 날이다
이 사건은 당시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인 이길용(李吉用)의 주도로 이뤄졌는데 사장 송진우(宋鎭禹)와 주필 김준연(金俊淵), 편집국장 설의식(薛義植) 등 8명의 간부가 사직 당했고 신문은 8월27일자를 끝으로 무기 정간까지 당하고 말았다. 이길용을 비롯해 사회부장 현진건(玄鎭健), 사진과장 신낙균(申樂均), 화가 이상범(李象範) 등은 구속됐다. 이들은 40일 구류 생활 끝에 풀려났는데 특히 송진우, 설의식, 이길용 등은 장차 언론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야 했다.
이 이길용이 바로 인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 사건 이전에도 ‘3·1운동 1주년 선언문 배포 사건’으로 체포돼 1년2개월 동안 옥살이를 한 전력이 있다. 이 사건은 1920년 그가 대전역 개찰원으로 있을 때 우리 항일 조직이 작성한 그 선언문 ‘약 20장을 대전의 동지 최성운(崔聖云)에게 주고, 또 대전 시장의 한부(韓富)란 인물에게 약 100장을 수교하고, 시내에 살포토록 한’ 죄목 때문이었다.
그 때 경찰의 취조에서 그는 자신이 인천 우각리(동구 창영동) 출생임을 밝히고 인천 영화학교를 거쳐 배재학당 2년을 마친 뒤 일본 경도(京都)의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 예과 1년을 수료한 것으로 진술한다. 그 후 용산철도강습소(龍山鐵道講習所)를 나오는데 이것이 1920년에 ‘대전역 개찰원’으로 있었다는 사실과 부합한다.
아무튼 이 대전 사건과 관련해 송진우와 알게 된 이길용은 1923년 6월 동아일보에 입사하게 되고 고향 인천에서 첫 기자 생활을 하다가 서울로 올라가 체육부 기자가 되는 것이다.
일본 경찰이 그에 대해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고취, 선전할 우려가 있다’고 하면서 거듭 ‘요시찰 인물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런 성정은 인천의 배재학당 동문 모임인 인배회(仁培會) 활동을 통해서 더욱 다져지지 않았나 싶다. 이 인배회는 주로 사회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다. 그는 이 모임의 멤버였고 후에 회장을 맡기도 한다. 물론 그는 1924년 4월에 창립된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에도 참여했다.
좀 다른 방향이라면 송건우(宋健雨), 장건식(張健植), 고일(高逸) 등 일부 경인기차통학생들과 함께 제물포청년회를 조직해 기관지 ‘제물포’를 발간하면서, 거기에 글을 싣는 등 초보적이나마 문학 활동을 펴기도 했었던 것이다.
광복 후 동아일보에 재입사해 기자생활을 했고 한국민주당 집행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역기연맹(力技聯盟, 역도연맹), 씨름협회 같은 체육 단체를 결성한 것도 그의 공로였다. 후일 마지막 역작 ‘대한체육사’집필에 전념하던 중 6·25가 발발하고, 그 때 납북돼 생사 불명이 되고 만다.
광복절 하루 전, 만감 속에 오늘의 인천과 인천이 낳은 언론인, 체육인, 항일 애국자 이길용을 생각해 본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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