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 세워진 국내 최초 서양식 호텔… 숙박료 10배에도 성업
19세기 중엽부터 조선은 끊임없는 서구 열강의 통상 요구를 받았다. 병인양요나 신미양요는 이러한 과정에서 일어난 군사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에 대한 통상 요구는 서구 열강뿐만이 아니라 주변국이었던 청과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일본은 1875년 조선 진출에 있어 기선을 제압하려는 목적으로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이를 빌미로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됐고, 급기야는 1883년 인천의 제물포항이 열리게 됐다. 인천이 개항하자 일본, 중국, 미국, 영국 등 열강들이 개항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작고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던 제물포는 열강들의 각축장이 됐다. 제물포 개항장에는 외국인의 이입과 함께 상공업, 종교, 교육, 문화 등 다방면에서의 근대식 문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 대불호텔
개항 이후 외국인들의 이입이 점점 늘어나자 제물포 개항장에는 이들이 묵을 숙소가 필요했다. 당시 인천에서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우마차나 수레 등을 이용할 수밖에 없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구 근처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해야 했는데, 당시 개항장에는 외국인들이 묵을 만한 숙소가 없었다. 이러한 점을 간파한 일본인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와 그의 아들 호리 리키타로(堀力太郞)에 의해 건립된 것이 바로 대불호텔이다. 일본 나가사키 출신인 호리 부자는 처음 부산으로 와서 사업을 시작하다가, 제물포가 개항하자 인천으로 이주해와 많은 부를 축적했다. 이들 부자는 배를 타고 제물포항에 들어온 서양인들이 인천에서 하루 정도는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고, 제물포 개항장에 숙박업을 시작한 것이다.
1933년에 발간된 ‘인천부사’에 따르면 대불호텔은 1887년에 착공돼 1888년에 준공한 것으로 돼있다. 그러나 아펜젤러나 언더우드의 기록에 의하면, 그 이전에 이미 이 호텔이 영업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1885년 5월 제물포항을 통해 처음 조선에 들어온 인물이다. 이들은 당시 제물포항으로 들어올 때의 상황을 비망록 등으로 남기고 있다. 아펜젤러의 비망록에는 “끝없이 지껄이고 고함치는 일본인, 중국인 그리고 한국인들 한복판에서 짐들이 옮겨지고 있었다. 다이부츠 호텔로 향했다. 놀랍게도 호텔에서는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모시고 있었다”라고 제물포에서의 첫날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다이부츠(DAIBUTSU)는 대불(大佛)의 일본식 발음으로, 대불호텔은 아펜젤러가 들어오던 1885년에 이미 호텔로서의 영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그런데 이 시기의 대불호텔은 아펜젤러의 “잠은 잘 잤다. 비록 미국 호텔만큼 원기를 회복시켜 주지는 않았지만 기선보다는 한결 나았다”라는 기록과 “호텔방은 편안할 정도로 컸다. 그러나 몹시 더웠다. 저녁 식사를 위해 우리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테이블에 앉은 우리 앞으로 서양 음식이 놓였다”는 기록, 그리고 언더우드의 “당시 제물포에는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이 세운 극히 소수의 오두막집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우리는 이른바 고급이라는 라이부츠(다이부츠의 오식인 듯)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라이부츠의 침대들은 평평한 침상에 모포 한 장을 펴놓은 것이 고작”이라는 회상기의 기록 등을 종합해 보았을 때, 호텔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기는 하나 호텔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서양 음식까지 제공됐던 곳으로 개항장에서 가장 고급의 숙박시설이긴 했으나, 서구식 호텔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후 제물포항을 통해 드나드는 외국인들이 차츰 증가하게 되자 개항장의 호텔들이 성업을 이루게 됐고, 이에 호리 부자는 기존의 건물 옆의 부지를 구입해 호텔을 신축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대불호텔은 기존의 2층으로 된 일본식 목조 건물에서 11개의 객실을 갖춘 지상 3층의 벽돌 건물로 변모하게 됐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서양식 호텔로서의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인천부사’의 1888년 준공됐다는 대불호텔은 바로 이 신축된 건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1893년 발간된 최초의 인천 안내서인 ‘인천사정(仁川事情)’에 따르면, 대불호텔의 숙박 요금은 상등 2원50전, 중등 2원, 하등 1원50전이었다. 당시 한국식 여관에는 1박당 20~30전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하면 상당히 비싼 가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인천에서 성업을 하던 호텔들은 경인 철도가 개통되면서 사양길을 걷게 됐다. 경인 철도의 개통은 서울로 가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켰기에 더 이상 인천에서 숙박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청일·러일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인천을 통해 드나드는 외국인은 감소하게 된 점도 호텔업이 사양길을 걷게 되는데 큰 원인이 됐다. 이러한 까닭으로 대불호텔도 심각한 경영난을 겪게 됐으며, 결국 1918년 중국인들에게 매도되면서 문을 닫게 되고 말았다.
이로 본다면 대불호텔은 1902년 건립된 서울 정동의 손탁 호텔보다 최소 15년은 앞서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경인철도
개항 직후 인천은 수도 서울로 들어가는 교통편이 마땅치 않았다. 우마차 등을 이용하는 육로는 서울까지 12시간 이상 소요됐으며, 주로 화물 수송을 위해 ‘인천-용산’간 뱃길 또한 옛 세곡선의 항로인 강화의 한강 하구를 이용했기 때문에 그 소요 시간이 상당했다. 이 때문에 개항장에서는 대불호텔 등의 각종 숙박시설이 호황을 맞이하기도 했지만, 외국인들의 입장에서는 빠르게 수도 서울로 들어가기 위한 교통편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한반도에서의 영향권을 행사하려는 열강들은 경인선 철도 부설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처음 철도 부설을 희망했던 나라는 영국과 일본이었으나, 이후 미국·독일·프랑스·러시아 등의 열강들이 합류하면서 경인간의 철도 부설을 둘러싸고 치열한 각축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처음 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1894년 8월 일본이 일방적으로 ‘조일잠정합동조관’을 체결해 철도 부설권을 따내자 열강들은 강력한 이의를 제기했다. 그런 가운데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반일 여론이 비등해졌다. 이에 반일 여론을 등에 업은 미국인 모스(J R. Morse)는 알렌의 도움을 얻어 1896년 3월 경인철도 부설권을 얻게 된다.
경인철도 부설권을 얻은 모스는 친구인 타운센드(W. Townsend)와 함께 ‘한국개발공사’를 설립하고 콜브란(Collbran)을 기사장으로 임명해 본격적인 철도 부설을 시작했다. 모스의 ‘한국개발공사’는 1897년 3월 인천 우각현에서의 기공식과 함께 공사에 착수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금난을 겪게 됐다. 이에 대륙 진출의 야망을 가지고 경인 철도 건설을 갈망하던 일본은 재빨리 모스와 교섭을 추진하고, 여러 차례의 우여곡절 끝에 1898년 12월 철도 부설권을 매수하게 됐다. 철도 부설권을 매수한 일본은 ‘경인철도합자회사’를 설립한 후 1899년 1월 기존 모스의 설계를 일부 변경해 재착공을 했다. 같은 해 4월 23일 인천역에서 성대한 기공식을 거행한 후 6월부터 궤도 부설을 시작했다. 그 결과 1899년 9월 13일에 ‘인천-노량진’을 운행하는 경인철도의 임시 영업이 시작됐다. 1900년 7월 5일 한강철교가 준공된 3일 뒤인 7월 8일 ‘노량진-서울’ 구간이 개통돼, 마침내 같은 해 12월 12일에 서울에서 개통식을 가졌다.
개통 당시의 경인 철도는 증기기관차 4대와 객차 6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처음 ‘인천-노량진’ 간의 운행 시에는 오전, 오후 각 한 차례씩 하루 2회 왕복 운행됐다. 이후 승객이 증가하게 되면서 3회 왕복에서 4회 왕복으로 운행을 늘였다. 그러다가 ‘노량진-서울’ 구간이 완공돼 전구간이 개통된 이후에는 하루 5회 왕복으로 증편됐다. 개통된 경인 철도의 운행 속도는 시속 20∼22Km로, ‘인천-서울’ 간 총 33.2Km의 구간을 약 1시간30분 만에 주파했다.
경인 철도가 비록 일제의 대륙진출 및 수탈을 목적으로 개통됐지만, 개통하기 전 인천에서 서울까지 육로로 이동하는 시간이 12시간 이상 소요됐다는 점에서 본다면 획기적인 교통의 발전을 이루게 됐다고 할 수 있다.
남동걸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김동성기자/estar@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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