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海軍 창설의 요람, 인천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0-04-03 23:07:07
해군海軍 창설의 요람, 인천
우리 고장 인천은 예로부터 해상 방위의 요충지였다. 그런가 하면 국가 비상 시에는 왕의 피난 루트이기도 했다. 조선 현종 때의 영의정 홍명하(洪命夏)가 인천과 월미도에 행궁(行宮)을 설치하자고 했던 것은 위난에 대비하고자 함이었다. 숙종 때 민치대(閔致垈)가 영종보다는 인천을 방어하는 것이 득이 될 것이라고 상소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인천은 삼면이 바다에 닿아 있고, 양서(兩西ㆍ황해도와 평안도)와 삼남(三南ㆍ충청, 전라, 경상도)을 호령하고 있는 형상인데, 인천을 버리고 영종에서 방어한다면 옳지 않다”고 아뢰니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글·조우성 시인·인천시 시사편찬위원
인천의 군사적, 해양적 중요성은 근세에 오면 올수록 더 커졌다. 정조 때인 1785년 7월 조익(趙翌)은 오늘날 들어도 전략상 전혀 손색이 없는 상소를 왕에게 올린다.
“우리나라는 전쟁에 대한 경계가 소홀해 군 장비를 다스리는 정책이 허술합니다. 왜구의 침범이 없었던 해가 없었는데 뜻밖에 인천, 안산 등지로 들이닥친다면 어찌 손을 쓰겠습니까? 인천부를 옛 제물진 터(지금의 중구)로 옮기고 방영(防營)을 설치하여 부평, 안산 등지의 육로를 관할케 하여 육로를 방어하고, 영종도 등지의 수군을 관할하되 수로 방어를 겸하게 한다면 수륙 모두 방어하는 태세가 됩니다”고 아뢰었다.
놀랍게도 그의 상소는 오늘날 거의 그대로 실행되었다. 그 옛날 인천 읍내(지금의 남구 관교·문학동 일대)에 자리 잡고 있던 인천도호부를 지금의 중구로 옮기자는 건의는 개항 직후 그대로 실현되었고, 미군 부대 이전 후 월미도에 서해 방어를 책임지는 해군 제2함대 사령부가 주둔해 있던 정황과도 딱 맞아 떨어진다.
최초의 군함‘양무호’탄생
예로부터 인천은 서울로 통하는 직로였으며 1883년 개항 이후에도 관민 모두가‘도성의 인후(咽喉)’라 할 만큼 중시했던 곳이다.
1878년 어영대장 신정희에게 수도 방어를 위해 인천에 화도진 (花島鎭)을 짓고 포대를 설치하는 한편 1893년 영국의 도움을 받아 강화읍 갑곶진에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인 조선수사해방학당(朝鮮水師海防學堂)을 세운 것은 그러한 현실에 대한 대응책의 하나였다. 해군사 연구가 김재승(金在勝) 씨는“이 사관학교는 비록 1년 3개월간 존속했지만, 고종황제가 자주국방에 착수했다는 결정적 증거이자, 그 실체가 지금도 인천에 남아있는 중대한 사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조선의 젊은이들이 영국의 콜웰(William H. Callwell) 대위를 비롯한 영국 장교들에게 훈련을 받는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육군 제도도 확립돼 있지 못한 지금 해군 양성에 먼저 착수하면 안 된다”며 이를 노골적으로 방해해 1894년 11월경 교문을 닫고 말았다.
일제에 의해 자주국방의 의지를 꺾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종은 해군 창설의 꿈을 버리지 않고 그 몇 년 후 군함 도입을 결정하였다. 중신들은‘즉위 40주년 기념행사’에 예포를 쏘기 위한 군함 도입을 건의했지만, 이를 윤허한 고종은 대포가 달린 군함만 가지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리라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1903년 4월 1일 고종은 최초의 군함을‘양무호(揚武號)’라 명명하고 함장에 신순성(愼順晟)을 임명하였다. 신 함장은 개화파 거목 박영효의 도움으로 1895년 제1차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동경상선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로서 군함 양무호의 함장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양무호는 조종의 뜻처럼 강대하지도 순탄치도 못했다. 일본 회사의 농간에 속아 국고만 축내는 고물 배를 들여온 까닭이었다.
결국 신 함장을 위시한 72명의 대원들은 여러 악조건 속에 하나둘 양무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신 함장은 1904년 11월 새로 건조한 해관 감시선 광제호의 선장을 맡았으나 을사늑약 체결로 그의 임무는 1년 만에 그치고 말았다. 그 후 신 함장은 인천해원양성소 항해학 실습교관, 조선우선주식회사 소속 회령환 선장 등으로 재직하며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1944년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인천 자택에서 하직하고 말았다.
안병태 제독과 윤영하 소령
그러나 인천과 해군(海軍)의 태생적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광복 5년 후에 발발한 6·25전쟁 당시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우리 해군은 연합군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참가, 작전을 성공해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았고, 휴전 후 수도권과 서해를 방어하는 제2함대해군사령부가 월미도에 주둔하면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곳을 거쳐 나가 국토방위에 당당히 나섰던 것이다.
특히 2함대사령관 재직시 지역 유지들과 힘을 모아 월미도를 오늘날과 같이 푸르게 가꾼 인천 출신 안병태 제독은 후에 참모총장으로서 우리나라 해군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그의 동생 안병구 제독 역시 우리나라 최초의 잠수함 함장이었다는 것은 인천과 해군과의 인연이 돈독함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 옛날 민치대가 말했던 그대로 인천은 해상 방어의 요충에 틀림없지만 오늘날 그 영역이 서해 5도에까지 이르면서 인천광역시는 어느 지역보다도 더 뼈저리게 분단의 아픔을 감내하고 있다. 1999년 6월의 제1연평해전(第一延坪海戰)에 이어 한일월드컵으로 온 국민이 환호하고 있던 2002년 6월에 벌어진 제2연평해전은 세계인의 축제에 재를 뿌린 비극이었다.
당시 우리 해군은 전사 6명, 부상 18명,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하는 피해를 입었다. 북한도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로 퇴각하고 말았다. 당시 집중포격을 당해 전사한 고속정 정장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이 송도고(松都高) 출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인천시민들과 동문과 교사 들은 그의 장렬한 전사를 더욱 가슴 아파하였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6월 송도고는 윤영하 소령의 흉상을 모교에 제막함으로써 그동안 정부 차원의 추모식 한번 변변히 치르지 못했던 한을 되새기며 다시는 그 같은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모진 해전 온몸으로 막아낸 고장
지난달 10일 서해 북방한계선 부근 대청도 동쪽 약 9km 지점에서 벌어진 대청해전은 비록 아군의 피해는 미미했지만, 남북이 언제라도 총을 겨눌 수 있다는 냉엄한 분단 현실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그러나 인천에 자리 잡고 있는 인천해역방어사령부와 해양경찰청 등 군관(軍官) 기관이 유사시에 대비하고 있음도 잊지 말아야겠다.
‘프리덤 이즈 낫 프리(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경구는 결코 헛된 수사(修辭)가 아니다. 그 옛날 왜구의 침입에서부터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사건, 제물포해전, 인천상륙작전과 남북 분단의 거센 물결 속에 벌어진 1,2차 연평해전과 대청해전이 모두 그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고장 인천이 그 같은 모진 해전(海戰)들을 온몸으로 막아냄으로써 이 나라의 역사를 지켜왔다는 데 대해 인천시민들은 큰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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