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마을, 송학동 이야기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0-04-03 22:57:45
외국인 마을, 송학동 이야기
인천은 개항과 더불어 근대문화 도입의 선구지(先驅地) 역할을 했다. 1883년 개항장 중구에는 각국인들이 몰려들면서 그들만의 거류지가 만들어졌고, 일본·청국·각국공동조계가 차례로 조성되면서 자의든 타의든 국제도시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해관(세관), 외국인 상사, 서구식 주택, 공원, 호텔, 등대, 경인철도, 갑문식 도크 등 각종의 근대문물과 사회시설이 최초로 생겨났다.
글 강옥엽(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인천의 외국인 마을은 1884년 체결된 제물포각국조계장정(The General Foreign Settlement at Chemulpo)에 의해 일본 및청국조계를 둘러싼 형태로 현 중앙동·송학동·북성동·송월동·항동 일대 총면적 46만2천㎡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인천의 외국인 마을에 거주한 서양인은 많지 않았다.
제물포구락부가 신축되었던 1901년을 기준으로 개항장의 인구수를 보면, 전체 1만7천507명 중 서구인들은 75명에 지나지 않았다.이들 대부분은 영사관직원이나 세관 직원, 통역, 선교사, 의사, 그리고 일부 상인이었는데 각국공동조계의 땅은 모두 이들이 임차하고 있었다.
인천의 외국인 거류지 중 특히, 응봉산 중턱 송학동 일대에 건립된 외국인들의 주택은 마치 유럽의 주택지역을 방불케 하여타 지역과는 큰 차이가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도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의 주택지로 세련된 건축물이 많았던 곳이다.
송학동은 이름 그대로 이곳 언덕이 소나무가 울창하여 지어진 것으로 개항 당시는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에 속했는데 1912년일제가 산수정(山手町)이라 불렀으며, 광복 후 송학동이라는이름을 얻었다.
중구청 뒤 송학동 1가에는 각국공원을 위시해서 외국인들의사교클럽인 제물포구락부가 위치해 있었다. 제물포구락부는그야말로 개항기 서구문화의 이입현장이었고 지금도 인천문화의 전파지로서 활용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비스듬히 응봉산정에 자리했던 세창양행 사옥은 독일계 무역상사 직원들의 숙소이자 칼 발터의 주택으로 1898년 독일황제가 방문하고무도회가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는 청광각(淸光閣)이라는 이름으로 부립도서관으로 활용되었다.
그 아래 지금 인천시 역사자료관은 전 인천시장의 관사로 개항후 중앙동 4가에서 잡화상 등을 운영했던 일본인 사업가 코노(河野竹之助)의 별장이 있던 곳이다.
역사자료관 정문을 지나 인성초등학교로 가는 길에 세창양행 사원이었던 헨켈의 주택이 있었다.
맞은 편에는 지금은 빈 터만 남아 교회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1898년 경 인천해관장을 지낸 라포르트의 주택이 있었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토목공영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그리고 중구청 뒷 길에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빈 터는 개항후 인천에 온 독일인 상인 뫼르젤의 주택으로 부인은 중국인이며부동산으로 큰 재산을 모았다. 이후에는 인천미두취인소 사장 이이다(飯田)의 주택이 되었다가 식산은행 소유가 되었으며, 뒤에 산업은행이 인수하여 사택으로 활용했던 곳이다.
남부교육청 아래 모텔자리는 1896년 영국계 홈링거상회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매일신문의 사장이자 변호사였던 고토(後藤蓮平)의 주택 겸 사무실이 되었다가 광복 후 미국공보원으로 또 예총의 전신인 문총의 사무실로, 해군수로국 청사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그 바로 옆에는 중앙동에 대불호텔을 열었던 일본인 선박업자 호리히사타로(堀久太郞)가 1900년 무렵 경영했던 서양인을 위한 오락장과 궁도장이 있었다.
송학동 2가에는 각국경계계단을 사이에 두고 라포르트 해관장 주택 맞은 편에 해관에서 근무하던 영국인 톰의 주택이 있었다. 나중에 중국인으로 해관의 통역관을 지낸 오례당이 새로 건물을 신축했다. 그의 아내 아밀리아는 포르투갈인으로 대지주이자 부동산 임대업자였던 그들은 외국인들 사이에 평판이 좋지 않았다.
율목동 시립도서관 자리도 원래는 오례당의 과수원이었다. 오례당과 그 부인은 현재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다.
오례당 건물은 일제강점기에는 상공회의소 대표를 지낸 요시다(吉田秀次郞)의 주택으로, 광복 후는 미군장교숙소 또 육군방첩대 사무실로 사용되다 화재로 소실되었다.
인성초등학교 일대에는 경인철도 부설권을 처음 획득했던 미국인 모오스가 1898년 경 세운 저택과 하와이 이민을 총괄했던 데쉴러의 주택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인천 최초의 일본식 정원을가졌던 이 집은 나중에 우로꼬(鱗樓)라는 요정으로 사용되었다.
송학동 3가 지금의 인성여고 체육관 자리에는 각국조계시공서현(市公署)가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는 공회당, 무덕관, 인천병원 관사 등으로 사용되었다.
그 뒤편에는 미국인 의사 랜디스가운영했던 ‘성 누가병원’이 있었다. 당시 헌신적이고 뛰어난 의술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약대인(藥大人)’이라 불렸으며, 그의 병원이 있던 언덕은 ‘약대인 산’이라 일컬어졌다.
아래에는 미국계타운센드 상회의 건물이 있었다. 타운센드는 처음에 화약제조 광산업을 하다가 정미업 및 스탠다드 석유회사 대리점, 담배회사, 상해외환은행대리점 등을 운영했던 인물로 역시 랜디스와 함께 현재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다.
비록 지금 송학동은 담장이나 축대 등 흔적만 있지만 남겨진 외국인들의 이야기는 개항장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당시 건립되었던 서구식 건축물과 그곳에서 생활했던 외국인들의 이력을 찾다보면 한국근대사의 중요한 공간이 바로 여기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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