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말 목장 이야기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0-04-03 22:34:11
인천의 말 목장 이야기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도’라는 옛말이 있지만, 인천에도 말 목장이 있었다. 지금도 강화군과 옹진군의 섬 지역에는 조선시대 군사용 말을 방목했던 마성(馬城)과 마장(馬場)의 흔적이 남아있다. 특히, 좋은 품종의 말 생산지로 유명하여 강화 매도목장의 ‘사자황’이라던가 진강목장의 ‘벌대총’은 왕이 탔던 우수한 명마로 알려져 있다.
글 강옥엽 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인천은 해안과 도서지역으로 되어 있어 말을 사육하기에 여건이 매우 좋았다. 조선시대에 말목장(소목장 포함)은 대부분 섬이나 해안지역에 설치되었는데, 이는 서울과 가까워 말을 관리하는 입장에서도 편리하고 또한 말을 사육하기 위해 필요한 좋은 수초(水草)를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섬으로는 제주도가 목장 수에서뿐만 아니라 규모에 있어서도 가장 컸으며, 그 다음이 인천으로 자연도·삼목도· 용유도·무의도, 강화의 진강장·매도, 옹진의 장봉도·신도 그리고 교동의 송가도에서 말과 소를 사육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인천군의 자연도는 제물량 서쪽, 수로로 30리에 위치하는데 사방 둘레가 25리에 국마 358필을 방목하고 있으며 수군과 목자(牧子)·염부(鹽夫) 등 30여 호가 있었다. 삼목도는 자연도 옆에 위치하는데 사방 둘레가 45리에 수군·목자·염부 등 30여 호가 있었으며 조수가 빠지면 자연도 목마(牧馬)가 서로 내왕하였다. 용유도는 삼목도 서쪽 5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사방 둘레가 23리에 국마 59필을 방목하고 수군·목자 등 20여 호가 있었다. 무의도는 서쪽 수로로 1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사방 둘레가 25리에 국마 92필을 방목하였으며 경작지와 염전이 없어서 살 수 없기 때문에 삼목도 목자가 내왕하면서 말을 돌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목자는 과중한 직책과 가혹한 부담을 안고 있던 신량역천(身良役賤)의 특수계층이었다.
목장을 설치하여 말을 사육한 것은 교통, 군사, 외교, 산업 등 다양한 용도를 위한 것이었지만 ‘나라의 중요한 것은 군사요, 군사의 중요한 것은 말’이라는『태종실록』의 기록처럼 주로 군사상의 요청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삼국시대 이래로 각 국은 국력을 기울여 말의 사육에 주력하였는데 고려에서는 태복시(太僕寺)를, 조선은 사복시(司僕寺)를 설치하고 양마(養馬)에 힘썼다.
그 가운데 강화도의 진강목장은 진강산과 길상산을 축장(築場)하여 1천500필의 국마를 사육하였는데 규모에 있어 제주도 다음가는 목장으로 양란 때에 우수한 전마(戰馬)를 보급하던 곳이다. 특히, 효종 때 북벌계획의 일환으로 우량 마종을 방목하고 전마 확보에 힘을 기울였는데 효종이 아꼈던 벌대총(伐代?)은 그런 북벌의 의지를 담은 명마로 유명하다. 또 효종이 볼모에서 풀려나 심양관에서 돌아올 때 청나라 황제가 말 한 필을 내어주면서 진강목장에서 산출한 말이니 함께 돌아가라고 했는데, 효종이 그 말을 타고 압록강에 이르러 강을 건너려 하자 말이 날아서 먼저 건넌 후 간 곳이 없었으므로 비로소 신종임을 알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강화의 매도목장 역시『용비어천가』에 나오는 태조 이성계가 탔던 8준마(駿馬) 가운데 일곱 번째인 ‘사자황(獅子黃)’을 산출한 목장으로 유명하다. 사자황은 태조가 고려 우왕 6년(1380)에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할 때 탔던 명마로 알려져 있다.
영흥도 목장의 경우『목장지도(牧場地圖)』에 따르면 말이 119필, 목자가 281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이 규모는 당시 전국 53개 처의 목장(제주지역 제외) 가운데 마필수로는 20번째, 목자수로는 3번째에 해당하는 큰 규모였다.
옹진군의 북도면 장봉1리 독바위 일대는 1454년경 설치되어 1895년 경 폐장된 장봉목장이 있던 곳이다. 말문(馬門)고개를 중심으로 산 중턱과 골짜기에는 말이 넘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석성을 해안까지 쌓았는데 현재도 성터가 부분적으로 잔존하고 있다.
북도면 신도 3리에 조성되었던 신도목장은 말 90필 정도가 방목되고 있었는데, 정조 9년(1785) 강화의 길상목장을 폐장하고 그 목마를 신도목장으로 옮겼던 것으로 봐서 조선후기까지도 중요한 목장으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목장은 임진왜란 이후 폐지 또는 축소되는 과정을 밟게 되었다. 임진왜란 중 남방 목장의 반 이상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 선조 27년(1594)에 40여 개 소가 폐지되고 말을 보급한 목장은 제주도 목장을 비롯하여 강화의 진강·신도·장봉도·매음도 등 25개소뿐이었다. 전란 중 우수한 전마를 보급한 곳은 진강과 가도가 유명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을 겪은 후 목장을 폐쇄한 곳이 73개 소에 달하였는데 인조와 효종이 목장을 부활시키는 등 마정(馬政)에 힘썼지만, 전란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 속에 목장을 경작지로 활용하자는 여론과 목자들의 가혹한 부담으로 인한 회피, 유망, 도살 등으로 조선후기로 오면서 목장은 전폐하고 말았다.
이와는 별개지만 인천은 1883년 개항과 더불어 개항장에 각국조계지가 조성되고 이들과 관련된 각종 근대시설과 다양한 서구문물이 들어오면서 국제도시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지금의 송학동 3가 7번지 타운센드 상회 부근에 있었던 우에노(上野)목장은 젖소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인천 최초로 근대식 시설을 갖춘 젖소목장으로 알려져 있다.
임해공단과 공장들로 인해 자칫 산업도시로 인식되는 인천에 바다 가까이 펼쳐진 언덕 위 푸른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들을 위한 목장과 그 흔적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다시 한번 다양한 문화유산을 가진 내 고장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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