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천의 옛모습

문학산 비류, 인천 2000년의 역사

by 형과니 2023. 6. 11.

문학산 비류, 인천 2000년의 역사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0-04-03 22:31:09

 

문학산 비류, 인천 2000년의 역사

 

세계의 역사에서 고대국가의 탄생은 철기문화의 도입과 직접적인 연관을 갖는다. 한반도에서 고대국가의 탄생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비류(沸流)백제 건국의 무대가 바로 미추홀(인천)이었고, 그 터전이 문학산(文鶴山)이었다. 한국사 연표에서 보면 백제가 국가를 세운 것은 기원전 18년이다. 인천 개항(1883) 100년을 기념하던 시점에, 지역의 역사학계는 비류가 미추홀인 인천에 도읍을 세운지 어언 정도(定都) 2000년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그냥 스쳐 지나갔다. 서울이 정도(定都) 600년을 내세웠을 때에도, 밀레니엄 역사에 대한 기념은 없었지만 문학산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그저 인천인의 마음의 진산(鎭山)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글 강덕우 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문학산은 해발고도 213m, 동서 약 2.5km의 작은 산기슭으로 남구의 문학동·관교동·학익동과 연수구의 선학동·연수동·청학동·옥련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인천 사람들은 예부터 문학산을 배꼽산이라고 불러왔는데, 산봉우리의 봉화대가 흡사 사람이 배꼽을 내놓고 누워 있는 형국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문학산은 일찍이 성산(城山) 또는 남산(南山)으로 불리었다. 산성이 있어 성산이었고, 고을 관아 남쪽의 안산(案山)으로 여겨져 남산이라 불렸다.

 

현재 부르고 있는 문학산이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단지 인천부사로 재임 중 학문과 교화에 힘썼던 이단상을 추모하기 설립한 서원에 학산(鶴山)’이라는 사액을 받음으로써(숙종 34, 1708) 학산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고 있고, 여기에 인천 향교의 문묘를 합하여 문학산이라 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이는 문학산이라는 명칭이 18세기 중엽(1757~1765)에 펴낸여지도서(輿地圖書)산천조(山川條)에 처음 등장하고 있는데 이후부터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산의 정상에는 테를 두른 듯한 모양의 산성이 축조되어 있다. 처음에는 토성이었던 것이 삼국 말 또는 통일신라를 거치면서 석성으로 개축되었고 이것이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류와 미추홀의 옛 성으로 기록된 이 산성은 비류정(沸流井)이라는 우물을 갖추고 있었고, 임진왜란 때에는 인천부사 김민선이 옛 성을 수축하여 지키면서 여러 차례 왜적을 무찌른 기록도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문학산성이 지닌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이의 수축이 논의되었고, 신미양요가 발생했던 때에 인천 연안의 방비가 중요시되자 일부가 다시 수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문학산성의 봉수는 갑오개혁을 전후로 봉수제도가 폐지되기 이전까지 사용되었는데, 멀리 전라도 순천에서 출발하여 진도, 수원, 그리고 안산의 정왕산 봉수에 잇닿고 있었으며 다시 부평, 김포, 강화, 양천을 거쳐 한성의 남산에 이어지면서 조선시대 군사적 통신수단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현재 성내에서 바라보면 북쪽으로는 인천향교를 비롯한 인천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남서쪽으로는 서해 바다가, 남쪽으로는 연수구의 신시가지가 바라다 보인다. 문학산성은 인천의 남쪽을 받치고 있으면서 서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어 유사시 생활근거지에서 입성하여 전술을 수행하는데 용이했을 것이며, 방어에도 유리했던 군사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문학산 일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쟁패 속에 부침을 거듭하다가 고려 왕조에 들어와 이 지역을 근거지로 해상무역으로 성장한 호족세력 인주 이씨(仁州 李氏)와 함께 다시 한번 왕가의 고향으로 거듭 태어났다. 7대에 걸쳐 80년 동안 고려의 정권을 장악했던, 그래서 한때는 칠대어향’(七代御鄕)으로도 기록된 인주 이씨 시대가 펼쳐졌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 곳을 중심으로 인천도호부 관아와 향교가 서고, 학산서원이 자리 잡은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한 세종비(世宗妃) 소헌왕후의 고향이었고, 세조 5년 자성왕비의 고향이라 하여 인천을 도호부로 승격하였는데(1459) 조선 말기까지 도호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문학산은 구읍으로 전락했고 인천의 정기를 파괴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김민선의 사당인 안관당의 훼철을 방관·조장했을 뿐 아니라 인천도호부 관아에 보통학교를 설립하였고, 심지어는 경찰주재소를 설치하는 치졸한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문학산은 더욱 퇴락하였으나 1958년 허물어진 동문을 복원하여 문학산성동문(東門)’이라 새겨 넣었고, 산성으로 오르는 길목에 십제고도문학산성(十濟古都文鶴山城)’이라는 표석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학산의 전략적 가치가 높았던 것에 기인했으리라 보이지만, 1962년 미군기지가 들어섰고 1979년 미군의 자리를 한국군이 이어 받게 되었다. 1986년 문학산성은 인천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됐지만, 인천 역사와 문화의 상징적 지역인 문학산이 일부나마 인천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오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인천 도심의 한가운데서, 역사와 자연이 푸르게 살아 숨쉬는 문학산으로 되살리는 일에 이제 시민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지방정부 역시 문학산 성곽을 복원하고 산성과 문학경기장을 연결하는 탐방로를 조성하여 등산을 즐기면서 역사의 향기를 느끼도록 하고 있으며, 문학산을 생태적이면서도 역사적인 공간으로 복원해나가기 위한 여러 방안들을 마련하고 있다. 그간에 있었던 무관심에 대해서는 인천 시민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자명한 일로, 하루라도 빨리 그 시기가 앞 당겨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학산은 2천년의 백제 건국의 흔적이 남아있는 인천의 발상지로 인천인의 정체성 확립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