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옛 향수를 찾아서 15> 신흥동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0-03-27 11:33:44
국내최초 ‘사이다’, '소세지‘ 공장 있던 곳
개항 초 화장터와 공동묘지로 유명
<인천의 옛 향수를 찾아서 15> 신흥동
신흥동(新興洞)은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로 인천항 개항 이후에 생긴 마을이다. 개항 초기까지 시의 외곽 지역이어서 사람은 거의 살지 않고 화장터와 공동묘지가 있던 곳으로 특히 청일전쟁 당시 사망한 일본군들의 공동묘지가 이곳에 있었다.
그 뒤 사람들이 점차 모여들어 살기 시작하면서 화장터와 공동묘지는 다른 곳으로 옮겨가며 1903년 들어 동네 이름이 화개동(化開洞)으로 바뀌었다. 이중 바닷가 쪽은 1910년대에 매립이 될 때까지 옅은 백사장에 물이 들어오는 곳이 많아 모래 말이라 불리기도 했다.
‘꽃이 핀다’는 뜻의 ‘화개’라는 땅이름은 이 동네의 경우 사창가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1900년대 초부터 유곽이 들어서며 크게 번성하자 새로 붙여진 이름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곳 화개동을 조금 다른 발음으로 ‘화가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유곽이란 사창가를 일컫는 일본식 표현인데, 개항 뒤 인천에 계속 들어온 일본인 들을 따라 몸을 파는 일본 여성들이 들어와 생겼다. 처음에는 지금의 답동 성당 언덕 아래와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주변, 그리고 전동 인일여자고등학교 아랫길 등에 사창가를 형성했다.
이 때 이들을 따라 같은 일을 하는 우리나라 여인들도 생기기 시작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지역에 상가 또한 계속해서 늘어나자 선화동에 ‘부도루’라는 일본식 유곽을 짓고 이곳으로 여인들을 이주 시킨 것이다.
이곳의 유곽은 일제 총독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한국인 공창이었으며 지금의 만석동 등지에는 일본 여자들이 몸을 파는 일본 공창이 있어 모두가 광복 직후 폐지되기까지 계속 자리를 지켰다.
1932년도의 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당시 인천의 인구가 5만명, 일본인 인구가 1만2천명이었는데 이중 몸을 파는 한국여자가 84명, 일본 여자가 78명으로 나와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도 1960년대 초 신흥시장 한 쪽에 자리 잡은 유곽은 어림잡아 10여채가 들어서 영업을 한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바깥에서 볼 때 조그만 방마다 작은 창문이 나있고 창문은 분홍빛 커튼으로 가져졌으며 커튼 사이로 역시 분홍색 불빛이 새어나왔다. 이 때 사람들은 이곳을 홍등가라고도 불렀는데 이름에 어울리게 분홍색이 유독 많았다.
선화동의 유곽지대는 시간이 지나면서 당국이 윤락행위를 묵인한 이른바 ‘특정지역’인 숭의동과 학익동으로 밀려났다. 이곳은 광복 후 신흥동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는데, 글자 그대로 ‘광복을 맞아 새롭게 발전하고 부흥하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흥동 남동부 해안에서 낙 섬까지 이어지는 1km의 바다를 일본인들이 1913년 매립해 이곳에 염전을 만들었는데 그 규모가 대단했다. 염전 끝에는 수문을 이용해 바닷물을 담수시킨 뒤 정화된 바닷물을 끌어올려 소금(천일염)을 생산했다.
이곳 저수지는 수심이 어른들 한 키 정도로 매년 물놀이 도중 익사 사고가 발생했으나 당시에는 안전장치는 물론 경고 안내판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또 신흥동 동네 한복판에서부터 시작해 율목 공원으로 올라가는 중턱에 법당(대웅전)을 지어놓은 해광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절개지에 쌓아놓은 석돌의 높이가 7~8m 정도였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친구들과 나는 동네 형들이 상금으로 내 걸은 눈깔사탕이 욕심나 석돌을 타고 올라가는 장난을 일삼았다. 물론 떨어지면 크게 다치는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장난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밖에도 신흥동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사이다공장이 있어 더욱 유명했다. 국내 최초로 생긴 스타사이다는 병뚜껑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일본말로 라무네라고 하는 유리구슬이 병 입구를 막아 사이다의 유출을 방지해주었다.
말 할 것도 없이 유리구슬의 정밀도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어린 마음에는 그저 신기 할 뿐이었다. 병을 막고 있는 유리구슬은 손으로 힘껏 밀면 병 안으로 구슬이 떨어지며 사이다를 마실 수 있다.
특히 사이다를 마실 때 병을 거꾸로 들어 마시는데 한꺼번에 많이 마시지 못하도록 구슬이 병 입구를 막아주는 역할도 했다. 이외에도 크라운 소세지공장이 있어 오후 5시만 되면 진풍경을 보여줬다. 신흥동 사람들은 물론 이웃 동네에서도 몰려와 소세지를 가공 처리하고 남은 돼지 뼈를 사기위해 공장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렸다.
대가족이 둘러앉자 두부를 만들고 남은 비지와 시큼한 김치에 돼지 뼈를 넣고 끓인 찌게의 맛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 그 시절은 왜 그렇게 배가 고팠는지?
남용우 객원기자 nyw1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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