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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옛모습

역사 속 월미도 파노라마

by 형과니 2023. 6. 12.

역사 속 월미도 파노라마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0-04-03 22:50:39

 

역사 속 월미도 파노라마

 

 

월미산 전망대에 올라서면 끝없이 펼쳐진 바닷가에 인천대교의 웅장한 자태가 그 속살을 드러내고, 수많은 상선과 유람선들이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때 개항이라는 이름으로 열강의 군함이 활보했던 이 평화로운 섬은 제국주의의 희생물이 되기도 하였지만, 섬 아닌 섬 월미도는 유사이래 인천과 운명을 함께 했고 앞으로의 화려한 부활은 곧 인천의 미래라 할 수 있다.

 

글 강덕우 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달꼬리처럼 생기지도 않았지만 월미(月尾)라는 이름자로 인해 그렇게 불려왔던 섬 월미도는 어을미도(얼미도월미도)’에서 유래한다. 인천 앞 바다의 물이 휘감아 도는 형상을 나타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명칭은 숙종 34(1708)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하고 있고, 19세기 후반 김정호의대동여지도에 와서야 비로소 월미도란 지명과 월미행궁의 위치를 표기하고 있다.

 

월미도가 한국의 역사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병자호란의 아픔을 겪은 뒤였다. ()에 대한 북벌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던 효종 7(1656), 월미도에 국왕의 임시 거처인 행궁(行宮)을 설치하였는데 호란 당시 서울~김포~갑곶진~강화도로의 도피로가 적에게 노출됨에 따라 강화도에 입도하지 못한 전철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유사시 인천에서 월미도~영종도를 경유하여 초지진을 거쳐 강화도로 피신하기 위한 것이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자 월미도는 중대한 국제사건으로 유명세를 치르게 된다. 그 첫 번째가 1866년의 병인양요로 프랑스 함대사령관이던 로즈(Pierre G, Roze)제독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월미도를 로즈도(Rose Island)로 명명하고 해도(海圖)에 기록했다. 아마 1871년 신미양요때에도 미국함대는 로즈도를 목표로 침입했을 것이다. 일시나마 월미도는 우리도 모르게 서양이름을 갖는 이변을 겪었다. 1882년 임오군란 때에는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가 쫓기는 신세가 되어 월미도에 숨었다가 간신히 영국선박 플라잉 피시호를 타고 일본으로 도피한 일도 있었다.

 

1883년 개항지로서 인천 제물포가 선택된 데에는 다름 아닌 월미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월미도 정박지가 영종, 대부 등 여러 섬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어 풍랑이 있더라도 큰 파도가 칠 걱정이 없고, 대형 선박이 항상 정박할 수 있으며, 제물포와 월미도 사이에는 썰물 때도 한줄기 수로가 형성돼 있어 선박이 접안하여 화물 등을 실어 나르는데 지장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제물포와 월미도는 순치의 관계였던 것이다.

 

20세기에 접어들자 청일전쟁(淸日戰爭)을 승리로 끝낸 일본은 한국을 장악하고 러시아의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전쟁준비로 분주했다. 1891년 월미도에 이미 해군용 석탄을 저장하는 창고를 설치한 일본은 러일전쟁 중인 1904년 월미도를 군용지로 삼아 민가 및 묘소를 강제로 철거하고, 인천역과 월미도 사이에 철도를 부설하여 소월미도에 양륙한 군용화물을 수송하였다. 이리하여 월미도는 병참기지가 되었고 러시아 함대를 기습 격침한 제물포해전에서 승리함에 따라 완전히 일본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월미도의 또다른 변신은 1918년부터 시작되었다. 풍치지구로 지정한 것을 시작으로 군수물자를 운반하던 월미도 중턱에 순환도로를 뚫고 벚나무, 아카시아 등을 심어 봄이면 벚꽃이 만발하였다. 또한 각종 위락시설이 들어서면서 월미도는 봄이면 전국에서 상춘객이 몰려들었고 철도국에서는 경인철도에 화열차(花列車)를 운행하기도 했으며 여름이면 해수욕장과 조탕(潮蕩)을 찾는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았다. 월미도가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것 중의 하나는 바닷물을 데워 목욕물로 사용한 우리나라 최초, 유일의 조탕을 개발한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월미도는 해변가에 대형 풀이 증설되고, 밀물 때 마치 바다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설계한 용궁각(龍宮閣)이라는 일본식 요정도 생겨났다. 1935년 무렵에는 3층 목조 건물인 빈()호텔이 건립되어 많은 행락객들이 찾아들었다. 월미도는 미녀를 갖추고 즐기는 유원지로 조선인의 머리 속에 각인되었고, 신문들은 경인도시의 오아시스’, ‘해상낙원의 극치등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이미지를 극대화 하였다. 유원지 조성은 조선인들이 민족의식과 저항의식을 희석시키려 했던 간계로도 작용하고 있었다.

 

광복 후 월미도의 위락시설은 적산(敵産)으로 미군정에 접수되었고, 1948년부터 지역 유지들이 월미관광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시설을 개보수하여 월미도 조탕(潮湯)을 재개장하여 운영했지만 인천상륙작전 중에 소실되고 말았다. 1950910일 미 해병대 항공기는 네이팜탄으로 월미도를 폭격한 이래 65회에 걸쳐 인천지역을 폭격하였다. 월미산의 아름다운 풍경은 초토화되어 옛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1974년 월미도와 소월미도 사이에 초현대식 갑문을 설치하여 인천내항 전체를 선거화(船渠化)한 공사가 완공됨에 따라 완전히 육지와 연결되었다. 반세기 동안 월미산은 군사기지로 엄격한 통제·제한구역이 되었으나, 19877월미도 문화의 거리가 조성된 이래 문화예술 공연과 월미축제 등 각종 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지고 있다.

 

2001년 관광특구 지정과 맞물려 친수공간 확장과 월미산 개방이 이루어졌고, 한국이민사박물관이 들어서서 지역의 역사성을 재확인시키고 있다. 또 전통공원을 조성하여 쉼터로 제공하고 있으며 거기에 하늘을 달리는 월미은하레일이 곧 개통될 예정이다. 근현대사의 숱한 사건을 묵묵히 지켜본 이 섬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좀더 다양한 인프라가 구축되어야 함은 물론 월미 팔미섬을 감돌아 오대양으로 뻗어 나갈 그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