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통해 만난 인천과 미국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0-04-03 22:58:27
전쟁을 통해 만난 인천과 미국
경인년은 인천상륙작전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동족상잔의 뼈아픈 상처를 아물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저 세기적인 단안은 개항기 강화도를 침공해 ‘피의 빚’을 졌던 미국이 그를 되갚은 보은의 작전이기도 했다. 전후 폐허를 딛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오늘, 혹여나 내 고장에서 벌어졌던 전쟁의 실상과 그 역사적 자취를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닌지 시리즈를 통해 되새겨 보고자 한다.
글·조우성 (시인, 인천시 시사편찬위원)
대동강에서의 불행한 만남
19세기 인천 앞바다에는 예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모양의 배들이 나타났다. 이름 하여 ‘이양선(異樣船)’이라 했다. 조선의 판옥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수백 명의 병사를 싣고 쏜살같이 바닷길을 달리는데다가 이물과 고물에 이르는 배 전체에 검은 칠을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양선을 처음 맞딱드린 것은 조선 인조 때 네덜란드 상인 하멜이 표류해 온 것이지만 본격적인 출몰은 점증하던 서구 제국주의 세력들에 의해 계속되었다. 그들은 통상 요구와 자국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측량과 해도 작성 등을 핑계 삼아 조선을 정탐했고, 그에 따른 충돌 또한 불가피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미국도 ‘은둔의 왕국’을 주시하고 있던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고종 3년(1866) 7월 미국 국적의 제너럴셔먼 호가 중국 텐진 항을 출발, 평안도 용강 주영포에 와 통상을 요구한 것은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러나 조선은 그를 거절했다.
그럼에도 제너럴셔먼 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태평 지역에서 조선 측과 마찰을 빚었고, 끝내는 평양부 주민들이 배를 침몰시키고 선원을 타살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불행했지만 그것이 조선과 미국과의 첫 만남이었다.
강화에서 벌어진 신미양요
이 사건을 프랑스 신부 리델에게서 전해들은 미국은 미국인 선원의 생존 여부와 생존 시 그들의 안전 귀환을 주선해 줄 것을 청나라에 요청하였고, 그 이듬해 1월 군함 초지진을 공격하고 있는 미국 해병대(밀리터리 히스토리 1996년 4월호 전제) 와츄세트 호를 황해도 장연에 파견해 진상 파악을 요구하는 과정 등을 통해 그것이 ‘조선의 정당방위’ 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양선을 끌고 가 일본을 개항시킨 전력을 가지고 있는 미국은 이를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킬 야심을 갖게 되었고, 논의 끝에 고종 8년(1871) 5월 16일 해군 제독 로저스가 이끄는 5척의 함대를 조선 원정에 파견했다. 로저스는 5월 23일 덕적도 인근 입파도에 정박해 인천과 부평 연안을 오르내리며 해로를 측량했고, 5월 30일에는 작약도 해상에 정박했다.
그날 로저스는 한강수로를 탐사한다며 소형선 정찰대를 손돌목 쪽으로 보냈다. 이튿날 광성보를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그들에게 화포를 쏟아 부었다. 그러나 구식 무기로 무장한 조선군은 미군에게 별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로저스 제독은 이를 불법적인 선제공격이라 비난하며 열흘 내에 사과하지 않을 경우 보복조치를 단행하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조선 정부에 전달했다. 이에 대해 조선 정부는 6월 6일 콜로라도 호에 관리를 파견하여 그것이 정당방위였음을 알렸으나 로저스는 6월 10일 초지진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초지진을 점령한 미군은 다음날 덕진진을 공격했는데 조선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퇴각하고 말았다. 미군은 여세를 몰아 5백여명의 조선군이 지키고 있는 광성보를 향해 돌진했다. 물살이 세고 굴곡이 심한 지세를 이용해 광성보를 지키고 있던 어재연 휘하의 병사들은 치열한 전투 끝에 대부분 장렬히 전사했다.
“조선군은 근대적인 무기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한 병기를 가지고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해 용감히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하여 그토록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은 병사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김원모, 근대한미교섭사)
광성보에 게양되었던 ‘수자기(帥字旗)’ 대신 비록 성조기가 성벽에 휘날렸지만, 전투에 참전했던 ‘슐레이(W.S.Schley)’ 소령의 회고는 당시 조선군이 얼마나 용맹과감했고, 그들이 의연하고 군인다웠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그 같은 조선군의 강렬한 저항에 움찔한 미군은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하였음을 주장하는 서신을 재차 조선정부에 보내고 그 해 7월 2일 제풀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조선과 미국과의 만남은 그렇듯 ‘피의 빚’을 남긴 채 봉인돼 가는 듯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총칼 거두어
그러나 그로부터 11년 뒤인 1882년, 조선과 미국은 다시 한번 우리 고장 인천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번에는 총칼 대신 외교의 문서로써 서로가 우호 교통하자는 조약을 체결하였던 것이다. 조약의 이름은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었다.
이 조약 체결의 배후에는 청(淸)이 있었다. 1876년 조선이 일본과 조약을 맺어 개항하게 되자 미국도 수교를 서둘렀다. 이때 청국은 조미 간의 수교를 성립시켜 일본을 견제하고 자신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자 수교를 권고하였다. 초기에 이 권고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1880년 수신사 김홍집에 의해 ‘조선책략’이 유입되면서 대외정책이 ‘개국’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조선정부는 1882년 5월 22일 인천 제물포에서 조선 측 전권대신(全權大臣) 신헌(申櫶)과 미국 측 전권공사 슈펠트(Robert W. Shufeldt)간에 전문 14관(款)으로 이루어진 조약을 체결하였다. 전문 14개조로 된 조약의 제1조는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에는 다른 한쪽 정부는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을 한다.”고 되어 있다. 이어 제11조는 “양국간에 언어, 문예, 법률 등 문화 학술교류에 보호와 원조를 다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조약의 체결로 1883년 4월 초대 미국공사 푸트(Lucius H. Foote)가 정식으로 입국하였고, 조선정부도 같은 해 6월 민영익(閔泳翊)을 수반으로 하는 보빙사 일행을 미국에 파견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 문호개방을 하게 되었고 비로소 조선과 미국의 역사적 교류가 시작되었다.
조미(朝美) 수교 이후 미국인들은 조선의 개화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으며 인천 지역사회 발전에 어떠한 역할을 해 왔는지 그리고 오늘날 우리나라의 유일한 군사 동맹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직접적 동인은 무엇이었는지 다음호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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