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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노동운동 (2)정미소

by 형과니 2023. 3. 16.

정미소(2)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2-02 04:11:58

 

노동자 3천여명 동맹파업

24.노동운동 (2)정미소

 

 

인천에 있는 역무정미소 인부 감독 산본은 지난 4일 정보여직공을 때려 낙택케하얏다. 피해자는 인천 송현리 48번지 한길록의 처 백씨인데 그날 공장에서 잠깐 졸고 있을 때에 산본이가 달려드러 난타를 했다고 한다. 그리하야 피해자는 임신 3개월의 몸이었으므로, 3일만에 필경 낙태를 했는데 그의 남편은 고소를 제기코저 준비중이라고 한다.’(1931729일자 동아일보)

 

 

1910년대의 공업은 일본 제국주의의 직접적인 약탈과 관련된 농산물가공업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그 중 정미업과 조면업이 총 생산액의 61%나 점유했다.

 

인천은 189655일 인천미두취인소가 문을 열며 전국 최대의 미곡 집산지가 됐다. 경기도를 비롯해, 황해도와 강원도, 충청남북도에서 생산된 쌀은 모두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실려갔다. 당연히 인천에는 쌀을 고르는 정미소가 많았다.

 

1929년 인천에 있는 전체 공장 중 21%가 정미소였고, 이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수는 2813명으로 전체 인천 노동자의 71%에 달했다.

 

동정 직공들은 아침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집을 나와 온 하루를 먼지와 북데기 속에서 노동을 하여 겨우 하루 품삯 1원을 받는바, 그것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해서 또 밤이 새도록 잠을 자지않고 차지찬 야기(夜氣)와 쾌쾌한 먼지 냄새 속에서 일을 해야 겨우 그날그날을 생활을 해 가는 것이다’(시대일보 19251225일자)

 

정미업은 흰 수건을 머리에 쓴 여공들이 하루종일 좁은 공장에 일렬로 길게 늘어선 작업대에 앉아 쌀알 하나하나를 고르는, 거의 모든 과정이 수공업으로 진행된다. 때문에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필요한 노동집약적 산업이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 여성노동자와 유년노동자들이 비정규직으로 일했다. 이들의 임금은 턱없이 낮았다. 일본인에 비해 절반 수준에 머문 임금을 받고, 하루에 1113시간 중노동에 시달렸다. 일할 수 있는 날도 적었다. 정미업은 쌀값 폭락 등 경기에 예민하다보니, 휴업과 조업단축이 빈번했다. 최소한의 생활도 확보하지 못한 식민지 노동자들의 삶은 가계보충을 위해 부인과 자식들까지 공장으로 내몬 것이다.

 

이런 노동자들의 삶은 문학작품에도 어김없이 녹아있다. 엄흥섭의 단편 소설 새벽바다’(193512조광지에 발표)는 날품팔이 부두노동자 최 서방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본인 집에서 파출부로 일하는 최 서방의 부인, 그리고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 딸과 하루종일 줄에 묶여 방안에서 지내는 어린 아들을 통해 식민지 노동자들의 빈궁한 삶을 그리고 있다.

 

1926124일자 조선일보는 대표적인 정미소인 가등정미소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고발하는 기사를 싣는다. 화정(花町)에 위치한 가등정미소에서 일하는 200명의 유년노동자들은 12시간 일을 하고 3090전의 임금을 받고 있으며, 추운 겨울에도 물을 끓일 수가 없어 냉수를 마시고, 사무직 직원들의 태만으로 일이 끝나고도 34시간 뒤에야 하루 일당을 챙길 수 있다는 내용이다.

 

값싼 중국인 도동자들의 유입도 이들의 삶을 위협했다. 1923910일자 조선일보는 중국인 노동자 18천명이 인천을 통해 들어와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는 내용을 보도한다.

 

식민지 초과이윤에 시달리던, 노예적인 노동조건에 얽매여있던 노동자들은 결국 생존을 위해 뭉친다. 19191217일 조선물산정미소와 조선정미소 선미여공 350명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면 동맹파업을 벌여 나흘만에 요구조건을 쟁취했다.

 

192315일 역무정미소에서 일본인 감독이 선미여공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여공들이 파업을 벌였고, 같은해 87일 정미소 측이 저임금의 중국인 노동자 고용하면서 임금을 줄이려고 하자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1923123일에는 조선인이 경영하는 40여곳의 정미소 노동자 1천여명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벌였다. 경찰은 선동자 2명을 구금하고 일부 노동자들이 복귀하면서 임금인상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파업은 동일부문의 노동자들이 단위 공장을 넘어 연합투쟁을 전개한 최초의 파업이다.

 

19263월 일본인이 경영하는 11개 정미소 남녀노동자 3천여명이 일하고 굶으나 놀다가 굶으나 굶음은 일반. 우리는 우리 생명을 위해 일하는 자가 되자는 선언을 하고 파업을 벌인다. 이 동맹파업은 일제하 인천에서 벌어진 파업 중 가장 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직공대우, 8시간 노동제, 작업중 면회 허용, 잔업수당 지불 등 요구조건을 내걸고 일제히 동맹파업에 들어갔고, 공장주들은 이에 항복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여전히 빈궁했다. 노동조건 또한 개선되지 않았다. 오히려 1930년대 들어서면서 세계 공황의 높은 파고와 제국주의 전쟁으로 더 가혹한 조건에서 일하게 됐다. /김주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