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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현실이 되는 곳 -[인천근대박물관]을 다녀와서

by 형과니 2023. 6. 16.

추억이 현실이 되는 곳 -[인천근대박물관]을 다녀와서

인천의관광/인천가볼만한곳

2011-01-07 11:51:12

 

추억이 현실이 되는 곳

-‘인천근대박물관을 찾아서

 

양진채

 

고백하자면 나는 개항장 때의 인천에 제법 푹 빠져 있다. 굳이 고백까지 들먹이는 것은 그전에는 인천의 과거이나 현재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없는 정도가 아니라 늘 서울의 변방처럼 붙어, 공단의 매연과도 같은 뿌연 인천이 싫었다는 표현이 더 가까울지 모르겠다. 잘나지 못한 나와 닮아 있어서 더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런 내 생각이 바뀐 것은 인천문인협회 지회장인 김윤식 시인을 만나고 나서부터이다.

 

김 시인과 술을 마셔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가 적당히 술에 취해 발그레한 얼굴로 옛 인천의 풍경을 손에 잡힐 듯 달달하게 풀어놓는 것을. 인천 앞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온갖 군상들의 활극이 자못 흥미진진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의 수다가 고맙기까지 했다.

 

어떤 날은 밤새 이어지는 천일야화처럼 끝나지 않기를 빌었다. 그럴 때 그의 어조는 천생 시인이었다소설가로 이름을 얻고, 여느 날처럼 김 시인의 얘기를 듣고 있던 나는 무릎을 쳤다. 그날부터 인천 근대를 배경으로 장편소설을 쓰고 싶다는 열망에 들떴다. 김 시인이 들려주는 주 무대가 1950-70년이었지만 그 이전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소설적 무대를 1920-30년대까지로 잡았다. 인천의 가장 화려했던 개항기를 다루면서 인천이 다시 한 번 옛 명성을 되찾기를 바라는 작은 애향심도 있었다. 무성영화 시절의 최고 인기를 누리던 변사(辯士)를 주인공으로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첫 장편소설을 쓰는 내게 분명 과욕이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영화며 인천 역사를 뒤지고 다녔다. 덕분에 무엇이든 옛 냄새가 나는 물건만 보면 단박에 눈이 빛날 수밖에 없었다. 지난 8월에 차이나타운 화교 앞에 문을 연 인천근대박물관역시 내 관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인천근대박물관을 찾아간 날은 기온이 뚝 떨어졌고, 바람까지 불었다.

 

나는 중국인 거리로 들어가기 전, 패루 옆 벽에 붙은 중국인 거리 안내도를 살펴보았다. 삼국지 거리, 자장면 거리, 제물포구락부, 조계지 계단를 차례대로 훑었다. 바람이 얼굴을 할퀴었다. 안내도를 따라 인천근대박물관으로걸어 갈 때마다 한 세월씩 뒤로 물러나는 느낌이었다.

 

인천근대박물관이 개인이 그동안 가지고 있던 수집품만으로 박물관을 열었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무언가를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수집이라고는 어렸을 때 한참 붐이 일었던 우표 수집을 오빠가 하는 걸 보고 따라한 정도가 전부인 나였다. 대통령 외국 순방 시리즈, 다섯 장이나 열 장으로 이어진 숲 그림은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인사를 나눈 최웅규 관장은 다부지고 고집 센 인상이었다. 누가 뭐래도 한 길을 갈 사람. ‘도 아니면 모인 사람의 얼굴이었다. 2층으로 된 박물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수집품들은 여백 없이 가득했다. 설명을 듣지 않으면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고개를 갸우뚱할 물건들도 많았다.

 

그 진귀한 물건들이 최 관장이 40여 년간 수집해온 자료 중 극히 일부일 뿐이라니 대단했다. 게다가 그 자료들은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들이었다. 아낙의 바늘쌈지, 성냥의 변천 과정, 칫솔과 치약, 모자, 그 당시의 카메라, 축음기, 가정용 영사기, 자장면의 발상지 운운하는 공화춘문 양 옆에 세워졌던 현판 등등 옛 것이 넘쳐났다.

 

그 물건들을 하나하나 보는 동안 내 소설 속 주인공들이 살아나, 홍란이 성냥갑을 접어 붙이고, 기담과 묘화가 지금의 자유공원인 만국공원을 올라가고, 춘식이 배가 들어오는 포구로 내달리는 착각에 빠졌다. 들어오자마자 유심히 보았던 장식장은 구한말 영국영사관에서 사용한 영국제 대형장식장이었다는 데 흠집 하나 없이, 못 자국 하나 없이 일일이 짜 맞추고 조각한 것으로 값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하게 보였다.

 

1970년대에 충남 당진에서 인천으로 이사 온 최 관장은 개항장 거리를 보는 순간 인천의 자료들을 수집하고 싶은 욕구로 불타올랐다고 한다. 인천은 그만큼 타 도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면모를 가진 매력적인 도시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모아들인 수집품들은 인천시립박물관에서 1995향토민속자료 생활 용구류 특별 을 시작으로 수많은 전시회를 열었고, 텔레비전에 출현한 것 뿐만 아니라, 미국 L.A에서 그때 그 시절 생활사 자료 이라는 주제로 2만점이 넘는 물건을 전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인천근대박물관의 자료 전시품 말고도 두 군데 창고를 얻어 보관해야 될 만큼 많은 물건을 보관하고 있다는데, 전시된 자료를 주기적으로 교체 전시할 계획도 갖고 있었다. 그의 수집품은 국가기록원 나라기획관에 개인자료실을 운영할 정도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되기까지 최 관장이 수집품 하나하나에 쏟은 노력과 애정은 그 누구도 함부로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개인의 노력으로 인천의 역사 자료가 풍부해졌고, 그 가치를 보존해갈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는 시 차원의 노력과 지원이 필요치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최관장의 수집품은 개인의 수집품 이전에 인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나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품고 있을 여러 자료들을 보면서, 윤후명 소설가가 펴낸 산문집 나에게 꽃을 다오,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를 떠올렸다. 그 글 중에 도자기의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방법이 나오는데, 도자기를 오래오래 지켜보고 있으면 결국 싫증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뉘고 돼 있고, 이 가운데 아무리 지켜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짜 도자기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덧 붙여 존구자명存久自明, 오래되면 스스로 밝아진다는 말까지 덧붙여 글도 그림도 다시 읽고 다시 봐도 싫증나지 않는 작품, 그것이야 말로 진짜가 아니겠느냐 했다.

 

그 글귀가 떠오른 것은 자료의 진품이 의심나서가 아니라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고두고 바라보아야 할 것들이었다. 취재차 잠깐 들렀다 가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물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부모님을 모시고 와도 좋고, 아이의 손을 잡고 와도 좋다. 언제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관장님이 있으니 조금이라도 모르는 물건은 묻기만 하면 얼마든지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나들이 오듯, 쇼핑 가듯 자주 들러 그 물건들과 눈 맞추었으면 좋겠다.

 

틈틈이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이 물건 저 물건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석유난로의 심지를 돋우고 성냥으로 불을 켜던 내 어머니가 보이고, 수인선기차표를 내보이며 기차 칸에 몸을 싣는 아버지가 보이고, 맥고모자를 눌러쓴 할아버지가 보일 것이다.그리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 모습을 닮은 누군가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모습도 보일 것이다.

 

<새얼뉴스레이터 겨울호>

 

출처 : 인천 중구를 사랑하는 사람들

글쓴이 : 양파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