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성동-선창가 뱃고동과 갈매기 울음 아직도 아련
인천의관광/인천가볼만한곳
2011-12-23 12:54:37
선창가 뱃고동과
갈매기 울음 아직도 아련
응봉산 줄기가 내처 달리다 바다와 맞닿았다. 그 땅은 ‘곶’이 되어 고기잡이배들의 안식처인 포구가 되었다. 도크가 생기기 전에는 바다 물끝이 경인선 철도가 끝나는 지점 바로 밑까지 밀려들어왔다. 인천역 뒷편의 북성동은 바닷사람과 바다물건이 모여드는 왁자지껄한 선창가였다. 인천의 섬을 오가는 객선부두와 물위에 뜨는 잔교(棧橋)가 있었고 앞바다에서 걷어 올린 생선을 경매하는 깡시장 공판장이 있었다. 현재의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이 서있는 곳까지가 우리가 말하는 ‘제물포(濟物浦)’였다. 도크공사로 1973년 부두시설이 새 바닷가 연안부두로 이전했다. 부두는 옮겨갔지만 아직도 그곳에는 비릿한 선창가의 흔적이 남아있다.
글 유동현 본지편집장 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새우젓 골목과 뱀 골목
인천항 8부두 정문 건너에 작은 동네가 있다. 큰길에서 살짝 들어가 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곳을 새우젓 골목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인천 앞바다에서 잡은 새우를 소금에 절여 보관하던 창고와 가게들이 있었다. 사시사철 골목 이곳저곳에 새우젓 독이 일렬로 사열하듯 세워져 있거나 빈 통으로 나뒹굴었다. 김장철이 되면 사람들은 양동이 하나씩 들고 열차를 타고 오거나 자유공원 응봉산 고개를 지게 지고 넘어왔다. 파는 이와 사는 이의 흥정소리와 악다구니가 골목 밖으로 넘쳐나갔다. 골목에는 새우젓뿐만 아니라 건어물 가게들도 함께 있었다. 부두가 사라지면서 새우젓도 함께 떠나버렸다. 빈 창고와 가게에 인근 노동자와 도시 빈민들이 들어와 구들을 놓았다. 쪽방촌이 되었다.
새우젓 골목 옆에는 하얀 소금이 산처럼 쌓였다. 인근 섬과 주안염전에서 들여 온 소금이었다. 소금은 가마니나 포대에 포장돼 전국 각지로 실려 나갔다. 소금을 배에서 부리던 그 앞의 부두를 사람들은 한염부두라고 불렀다. 소금공장이 떠나고 그 자리에 5층짜리 동일아파트 두 동이 들어섰다. 옥상에 올라가 보았다. 새우젓골목이 한눈에 들어왔다. 반듯한 통로와 지붕 높은 집들이 일반 골목과는 분명 달랐다. 얼마 전 낡은 외벽에 총천연색 그림이 그려졌다. 마치 팔순 노파의 얼굴에 색조화장을 짙게 한 모습이다.
“난장이었지. 길바닥은 늘 물기로 진창이었고 지나다니다 물건끼리 사람끼리 부딪히고, 바다 끼고 사는 사람들이 한데 모이다보니 자주 싸움박질하고… 그게 사람 사는 모습이었지. 그때가 많이 그리워.” 아파트 마당 그늘 평상에서 쉬고 있는 박치국(75) 할아버지가 잠시 옛 모습을 회상한다. 그는 평안도에서 피난 나와 북성동에 거주하면서 조그만 배의 기관장으로 일하며 늘 바다를 끼고 살았다. 옆에 앉은 할아버지가 옛 모습의 조각 하나를 툭 던진다. “저쪽에 한번 가 봐요. 그 골목이 뱀 골목이요. 뱀 장수들이 야한 얘기를 곁들이면서 뱀과 약을 팔았어.” 아파트 담장을 끼고 도니 뱀처럼 살짝 휘어진 인적이 끊긴 골목이 나왔다, 주저앉은 집, 사람 살지 않는 집, 바람에 나뒹구는 쓰레기들. 이제 그곳은 뱀이 나올 만큼 스산하고 퇴락했다. 서둘러 돌아 나오려는데 뒤에서 뱀장수의 쉰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애들은 가라”
질펀했던 선창가 풍경
선창가에는 노점상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 중에는 매일 경인선 열차를 타고 서울로 가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큰 함지박에 얼음과 함께 물 좋은 생선을 담아 인천역에서 탑승했다. 출근 시간대의 열차 안은 생선냄새가 진동했다. 게다가 창문을 열수 없는 겨울철이면 승객들은 대놓고 말은 못해도 참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들이 노량진역에서 내리고 나서도 한참 동안 열차 안은 비린내가 배어있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풍경으로 한 시대를 살아간 이 땅의 억척스러운 왈순아지매들의 모습이었다.
선창가 그림에서 빠질 수 없는 풍경이 주점과 색시집들이다. 갈매기의 호위를 받고 만선 고기잡이배들이 들어오면 부두는 아연 화색이 돈다. 술집 창문 넘어 젓가락 두드리는 소리와 교태 소리가 밤새 흘러 넘쳤다. 섬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 때문에 부두 주변에는 여인숙 등 숙박업소가 늘 성업이었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집은 차이나타운에 있던 황해여관이다. 사람이 밀려들어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의 호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여관이 헐리고 그 자리에 중국음식점 ‘청관’이 들어섰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택시기사에게 청관가자고 하면 잘 몰라도 황해여관 있던 곳 가자하면 그 앞에 세워줄 정도였다.
선창가 흔적이 가장 뚜렷하게 남은 곳은 파라다이스호텔(옛 올림푸스) 밑 만석고가도로 옆이다. 바닷물이 드나들던 석축 위에 1958년경에 설립된 해무청사(인천해운항만청)가 있었다. 건축미가 뛰어난 격자무늬의 이 건물은 서울올림픽공원 정문 설계자 김중업씨의 작품이다. 이후 안타깝게도 이 건물은 헐리고 다시 짓고 93년 국립식물검역소로 활용되었다. 지금은 바다와 관계 없는 업체가 들어와 있다. 그 바로 옆에는 이국풍의 러시아 인천영사관이 있었다. 함포사격에도 살아남았던 이 건물은 74년에 철거되고 만다.
100년 가까이 된 부둣가 객주집
이 주변에는 아직도 그물을 비롯해 배에서 쓰는 어구들을 파는 선구점(船具店)들이 있다. 한눈에 봐도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빨간 벽돌집 앞에 섰다. 이쪽저쪽 사진을 찍고 있는데 안주인이 나왔다. “왜 찍어요?” “아, 좀 오래된 것 같아서요” “다 낡은 거 뭐 좋다고…” 다소 못마땅했지만 안주인은 바로 집의 이력을 술술 풀어준다. 이 집은 6·25전쟁이 끝나자마자 시아버지가 지금의 아트플랫폼 근처 폭격 맞은 창고 벽돌을 얻어다가 지은 집이다. 현재 4대에 걸쳐 사는 이 집은 창문틀 양식이 일제강점기 때의 그것과 흡사하다. 시아버지가 일러 준 것에 의하면 송월동에 있는 옛 비누공장 애경사의 벽돌과 재질이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림잡아 벽돌의 나이는 7,80년은 족히 됐다는 얘기다.
몇 집 건너가면 3층짜리 회색건물이 있다. 이 집의 사연은 더 드라마틱하다. “일제 대정시대에 지은 건물이에요” “대정시대요?” 스마트폰으로 바로 검색해 보았다. 1911년부터 1924년까지다. 그렇다면 길면 100년 짧아도 87년이다. 현재 5대에 걸쳐 살고 있는 이 집의 주인은 유광준(72)씨다. 겉으로 보기에는 콘크리트 건물 같은데 목조건물이란다.
“인천에 목조 3층집은 옛날 항도백화점 옆집하고 우리집 밖에 없었어요.” 3층까지 세워진 나무기둥들이 이 집을 지탱하고 있다. 짠바람 때문인지 벌레가 없어서 지금도 썩은 데가 한군데도 없다. 벽은 대나무로 엮고 짚을 섞은 진흙을 엉겨 만들었다. 92년도 작은 화재가 난 후 슬레트벽으로 덮었다. 이 집은 원래 ‘객주(客主)’였다. 부두 화물이나 생선의 매매를 주선하거나 위탁 판매를 하던 집이다. 나중에는 잠시 다다미가 깔린 공동주택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바다가 아직 그곳에 있다
오후 4시경 어디서 나타났는지 양동이를 들거나 캐리어를 끄는 중년여성들의 모습이 부쩍 많이 띈다. 그들의 발걸음은 급하다. “어디들 가세요?” “포구에 가는 거요. 꽃게 사러.”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대한제분공장 옆길로 바다에 다다르자 이미 보따리 하나씩 챙겨든 몇몇 무리들이 포구를 등지고 나온다. 초입부터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뒤엉켜 번잡하고 소란하다. 바로 옆에서 낚싯줄을 두리운 채 한가롭게 바다에 시선을 둔 강태공들이 모습이 인상적이다.
포구에는 20여 척의 고기잡이배들이 닻을 내려놓고 서로의 어깨를 꼭 낀 채 정박해 있다. 갑판 위는 작은 어시장으로 변했다. 꽃게, 새우를 비롯해 갖가지 생물들이 물 밖에서 발버둥친다. 사람들은 배로 내려가 어부들과 직거래를 한다. 고기 한 점 얻어먹기 위해 어디서부터 쫓아 왔는지 갈매기는 공중에서 절규한다. 그 소리가 소음에 가깝다. 덩달아 흥정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커진다. 난전이다. 그러길 한 시간. 거래가 끝나면서 사람들은 포구를 떠나고 갈매기마저 제 갈 길로 가버리자 바다는 이내 조용해졌다. 다시 강태공들의 세상이 되었다.
북성동 1가 1번지, 송월동에서 만석동으로 넘어가는 육교로 철길을 건너 만석동 우체국 옆길 동네를 지나가면 옛 외국인 묘지 자리가 나온다. 응봉산 줄기라고 할 수 있는 땅이 바다 끝에 멈추면서 구릉처럼 조금 불쑥 솟았다. 개항 이후, 주로 인천에 거주하다 사망한 서양 상인, 선교사, 외교관 가족들의 유해를 안치하려고 조성한 묘역이다.
1887년 7월에 첫 시신이 매장되었다. 뒤를 이어 상인 타운센드, 헤르만 헹켈, 의사 랜디스 박사, 청국 외교관이었던 오례당 같은 인물들이 이곳에 잠들었다. 묘는 1965년 연수구 청학동으로 이전했다. 이후 묘역은 철도 부지로 편입되었고 지금은 높은 담장 안으로 둘러쳐져 고작 한 움큼쯤 되는 붉은 언덕에 어지럽게 줄기를 뻗은 아카시아 몇 그루만이 한에 사무치는 듯 고요 속에 기울어져 있다.
처음 묘지를 바닷가에 썼던 것은 언젠가는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묻히리라는 간절한 바람이었리라. 옛 묘역에 서니 그 영혼들이 바닷바람 따라 제 고국으로 돌아갔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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