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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관광,가볼만한곳

내동-경인식당 임금옥 할머니처럼 곱게 늙은 동네

by 형과니 2023. 6. 22.

내동-경인식당 임금옥 할머니처럼 곱게 늙은 동네

인천의관광/인천가볼만한곳

2011-12-23 12:58:36

 

경인식당 임금옥 할머니처럼

곱게 늙은 동네

 

감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예쁜 도심의 언덕길이라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적당히 경사진 산자락에는 이국풍의 예배당과 세월을 품은 주택이 바다를 바라다보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엽서다. 한때 안골말이라고 불리던 내동 언덕을 오르내리다 보면 골목어귀에서 파란 눈의 선교사와 구한말 조선의 관리들을 마주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글 유동현 본지편집장 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이민 갈 사람들은 줄을 서시오

 

조용한 동네, 내동에 요즘 망치 소리가 요란하다. 내리교회는 바로 옆 비탈진 언덕 아래쪽에 제물포웨슬리관 복원과 아펜젤러센터 건립 공사를 하고 있다. 공사장 가림판에 붙은 조감도에는 붉은 벽돌로 지은 예배당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제물포 웨슬리관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는 옛 내리교회 예배당이다. 각종 역사 관련 책자에서 내리교회를 얘기할 때 마다 등장하는 사진 덕분에 눈에 익숙한 예배당이다. 이전의 교회를 허물고 선교사의 도움 없이 1950년대 초 순수하게 내리교인의 헌금으로 봉헌한 성전이다. 그동안 설계도면이 없어 복원에 애를 먹었는데 미국 뉴저지연합감리교에 소장돼 있는 도면을 발견해 다시 짓게 되었다. 60여 년 전 비탈진 내리언덕의 풍광에 한몫했던 예배당이 다시 세워지는 것이다.

 

내리교회는 우리나라 이민사의 첫 장을 연 교회다. 그 현장이 교회 아래쪽에 있었다. 돈비어천가 음식점 옆 골목으로 들어오면 주차장이 나오는데 그 부근에 동서개발회사라는 간판을 단 하와이 이민사업 대행사가 있었다. 회사 대표 미국인 데쉴러는 내리교회의 도움을 받아 1903년부터 약 7500여 명의 조선인을 하와이로 이주시킨다. 이것이 우리나라 이민사의 첫 장이다. 동서개발회사는 폐업하고 해방 후 여러 세대가 들어와 사는 집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그 자리에 인천예식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몇 갈래로 난 윗길은 동인천과 신포동을 잇는 지름길이었다. 이 길을 통하면 용동마루턱에 있던 미락제과 앞으로 나오면서 큰길로 연결되었다. 이 길을 알고 있는 인천 토박이들은 동인천에서 신포동 갈 때 이 길을 이용했다. 이 골목에는 80년대 중반까지 토담벽을 한 초가집이 있을 만큼 변화가 더딘 동네였다.

 

내리교회 본당 옆으로 제물포 웨슬리관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웨슬리관은 1950년대 초 순수하게 내리교인 헌금으로 봉헌한 예배당이다.

 

 

뒷골목에서도 역사의 한 줄이 쓰여진다

 

좁은 골목으로 언덕으로 오르면 붉은 서양식 주택이 하나 나온다. 동네 사람들이 흔히 내동 벽돌집으로 부르는 유항렬 저택이다. 유항렬은 한국 최초의 도선사(導船士)이다. 그는 동경고등상선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도선사 자격증을 땄다. 조선우선주식의 선박 선장으로 인천~칭따오~상하이간을 운항한 바다 사나이다. 해방 후 일본인 도선사들이 모두 떠났을 때 구호물자를 실은 선박들을 홀로 인천항으로 안내했다.

 

그가 살던 이 주택은 223의 대지 위에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1933년에 지어졌다. 건축한 지 80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도 튼실하게 보인다. 벽돌아치와 굴뚝 등이 이국적인 모습을 풍긴다. 특히 눈에 띠는 것은 테라스. 이 테라스는 남쪽으로 나지 않고 서쪽으로 나있다. 서쪽에는 팔미도가 있다. 그는 이곳에 서서 망원경으로 팔미도 앞으로 들어오는 배들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지금은 아무리 각도를 잡아도 팔미도가 보이질 않을 듯 싶다.

 

안이 궁금해 초인종을 눌렀다. 답이 없다. 바로 옆의 구멍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저 집에 사람이 사나요?”, “오늘은 없을 거예요. 주말에 가끔 서울사람들이 와요.”

누가 오는 건가요.”, “그 후손들이 오는 것 같아요.”

 

건축은 한번 세워지면 사람의 수명보다 긴 세월을 버티며 동네를 지킨다. 이제 테라스에 서서 그 누구도 망원경으로 팔미도를 바라보지 않지만 그 집은 언덕에 기댄 채 바다를 여전히 바라보고 있다.

 

언덕 밑으로 내려가면 경인식당이 나온다. 점심 먹을 겸 식당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카운터에서 할머니 한분이 또렷한 목소리로 맞는다. 63년 전통 경인식당의 실제 손맛의 주인공 임금옥 할머니다. 벽에 조리사면허증 액자가 붙어 있다.

 

1349호 누런 면허증에는 쪽진 머리를 하고 한복을 입은 할머니의 빛바랜 사진이 붙어있다. 1919년생 37일생. 3·1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기 6일 전에 출생했으니 올해로 만 92세다. 28세부터 평양냉면을 만들어 팔았다. 지금은 아들 내외가 현재의 자리에서, 손자며느리는 서울에서 3대째 평양냉면을 만든다.

 

오늘 어떻게 나오셨어요. 이제 잘 안나오시잖아요

오늘 아들 내외가 일이 있다고 엄마, 오늘 하루만 좀 봐주세요해서 내가 나왔지

할머니 아주 건강해 보이시네요. 예전 그대로세요

오래 살아서 미안하지 뭐.”

 

미안한 게 아니고 고마운 거다. 할머니가 오래 사신 게 고마운 사람들이 옛 맛을 잊지 못하고 경인식당을 여전히 찾는다. 역사는 책 속에만 있는 게 아니다. 뒤쪽 골목 식당에서도 역사는 매일 쓰여지고 있다.

 

28세부터 평양냉면을 만들어 판 경인식당의 임금옥 할머니. 올해로 92세다.

 

서쪽으로 테라스가 난 유항렬 저택.

우리나라 최초의 도선사 유항렬은 이 테라스에서 망원경으로 팔미도 앞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백범이 옥고를 치른 인천감리서

 

아무리 생각해도 그 언덕에 아파트를 세운 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일이다. 내동은 한때 근엄한 관공서 하나를 품고 있었다. 1883년 개항 직후 이곳에 통상업무를 담당하는 인천감리서(仁川監理暑)가 생겼다. 나중에 인천부(현 인천시청)의 역할에다 개항장재판소와 학교까지 들어섰다. 행정, 사법 기능에 교육기관이 들어선, 요즘으로 말하면 일종의 행정타운이다. 감리서에는 감옥이 있었다. 포승줄에 묶인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1920년대 초까지는 죄인이 볼기 맞는 비명소리가 담장을 넘어 인근 민가에 들렸다. 백범 김구 선생도 이곳에서 3년 여 동안 옥고를 치르며 인천항 축항 공사를 하는 강제 노역에 동원되기도 했다.

 

1895년 관립외국어학교가 인천감리서 안에서 개교했다. 개교 당시 학생수는 30명으로 수업 연한은 4년이었다. 첫 졸업식에는 9, 2회 때는 단 한 명만 졸업했다. 이후 공립상업학교로 개편되고 1922년 현재의 송림초교 터로 이전하게 되는데 나중에 이 학교가 바로 인천고가 된다.

 

19722월에 법원이 석바위로 이전하면서 이듬해 대한준설공사가 들어섰다. 이 회사는 후에 한진그룹에 속하고 1990년 한진종합건설이 된다. 한진은 이 건물을 1996년경에 헐고 인천신포스카이타워라는 지하 2층 지상 12층의 아파트를 짓는다. 거대한 요새와 같은 이 아파트는 응봉산에서 불어오는 산바람과 월미도를 휘돌아 오는 바닷바람을 갈라놓았다.

감리서 표지석 옆에는 풍만한 몸매의 세 명의 나체 연인상이 세워져 있다. 불가마 사우나에서 세운 듯하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터에 볼썽 사나운 모습이다. 끌어내 볼기를 치고 싶다.

 

아파트 바로 옆에 언덕길이 있다. 이 길을 경계로 왼쪽은 외국인 조차지, 오른쪽은 조선인 부락이었다. 이 길은 성공회 내동교회로 이어진다. 1891년 한국 최초로 인성여고 부근에 세워진 성공회 내동교회는 1956년 현재의 위치인 성누가병원 부지에 교회를 다시 지었다. 내동교회는 6·25 전쟁에 참전해 전사한 영국전몰장병을 추모하기위해 그 유가족들이 모금 해 건축한 일종의 전쟁기념 성당이다. 50년대 말 까지 교회 안뜰에는 대공기관포가 있었다고 한다.

 

내동교회를 얘기하면서 의사 랜디스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조선식 온돌이 있는 성누가병원의 문을 열고 뛰어난 한문 실력으로 낙선시(樂善施·선행을 함으로써 기쁨을 준다)’라는 병원이름을 직접 작명하기도 했다. 환자를 헌신적으로 돌보던 랜디스는 장티푸스에 걸려 32세 나이에 요절했다. 그는 한복 두루마기에 쌓여 북성동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교회 뜰을 거닐다보면 갖가지 표지석과 기념비 그리고 흉상들을 만날 수 있다. 이를 읽다보면 구한말 역사의 한 페이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일본주택 뒤 막다른 골목에 세워진 나무전봇대

 

, 아직 살아있었구나

내동에서 신포길 39번길로 들어서니 축대에 올라선 예쁜 일본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야 이 동네에서 흔한 집이지만 지금은 희소성 있는 주택이다. 카페인가. 집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꽁지머리를 한 주인장이 나온다. “제가 직접 3년 전에 리모델링 했어요.” 집주인 전영호씨는 인테리어 전문가답게 손수 망치와 대패를 들고 하나하나 고쳐나갔다. “목재마다 마크가 새겨져 있더군요. 6,70년 된 집인데 골조는 끄덕없어요.” 33평 규모의 이 집은 한때 이천전기 사택으로 사용되었는데 곳곳에 옛 일본집의 원형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공사를 하고 있는데 일본인 사진가가 우연히 지나가 들렀는데 집안을 살펴보더니 눈물을 글썽이더라구요. 자기네 나라에서도 이제 보기 드문 집이라고 하더군요.”

 

집 뒤쪽 막다른 골목에는 나무 전봇대가 하나 서 있다. 보자마자 , 아직 살아있었구나하는 말과 함께 부둥켜안았다. 어릴 적 전봇대는 전기불을 밝히는 것 뿐 만아니라 아이들의 놀이에 다양하게 사용되는 기구 역할을 했다. 이 집은 최근에 영화나 드라마 촬영장 섭외가 심심치 않게 들어온다. 일본집과 골목 그리고 오래된 나무 전봇대, 앵글을 잡으면 한국영화가 아니라 일본영화의 어느 동네 한 장면으로 착각하지 않을까 할 정도다.

 

일본집에서 중앙동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크라운볼링장이 나온다. 1968년 원래 미군 댄스홀이었던 곳을 우리나라에서 서너 번째로 문을 연 볼링장이다. 한때 이곳에서 볼 좀 굴려야 인천의 멋쟁이 소리를 들었다. 학생시절 그곳이 궁금해 쪽문으로 훔쳐보면 자동화되기 전에 핀을 일일이 손으로 세웠던 핀보이들의 험상궂은 얼굴에 뒷걸음쳤던 기억이 있다. 몇 년 전에 쪽문은 정문으로 정문은 쪽문으로 바꾸며 레인의 방향도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볼 던지는 방향이 정반대로 바뀌었을 뿐 40년 넘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동네 풍경의 한 소재(素材) 역할을 하는 크라운볼링장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