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근대건축답사
인천의문화/해반문화사랑회
2008년 제34회 우리지역바로알기답사
강화도 근대건축답사
코스 : 강화 성공회 온수리성당(사제관)→강화남문→1928주택(황부잣집,김참의원)→합일초등학교→강화중앙교회(역사자료관)→조양방직→강화양조장→새 시장→이화직물공장건물→강화예식장→진무영터→강화천주교회→심도직물 터→대한성공회강화성당→용흥궁→연미정
강사 : 손장원 (재능대학 실내건축과 교수/인천광역시 문화재위원)
일 시: 2008년 5월 10일(토) 오전9시
주 최: (사)해반문화사랑회
강화도에는 성공회강화성당을 비롯해 지금도 많은 근대건축물이 남아 있으며, 강화읍에만도 9개가 있다. 조양방직 공장 및 부속건물, 황부자집(일명, 김참판댁), 강화양조장, 강화예식장 등은 근대기의 문화적 상징성과 더불어 건축물로서도 규모나 형식에서 그 가치가 충분하다.
주말이면 강화도를 찾는 사람들로 강화대교와 초지대교가 넘쳐나지만, 강화읍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더구나 강화도가 가진 강한 전통적인 이미지 탓에 이곳에서 근대건축물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읍내에서 강화도 주민들의 삶의 모습을 간직한 흔적을 돌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한편, 멸실되어 현존하지 않는 주요 근대건축물로는 강화초등학교, 길상초등학교, 교동초등학교, 강화군청, 불은면사무소, 길상면사무소, 화도면사무소, 삼신기선회사 등이 있다.
강화도에 현존하는 주요 근대건축물은 아래 표와 같다. 즉 강화도에는 이미 널리 알려진 한옥식 성당 외에도 시간과 공간이 중첩하는 과정에서 쌓이고 형성된 근대문화유산이 세상의 눈길을 피해 조용히 과거를 반추하고 있다. 강화도의 다른 곳에 전통건축의 미학의 있다면 강화읍내에는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근대건축의 미학이 자리를 틀고 있다. 비록 오래된 세월 속에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철창은 녹슨 채 방치되어 있지만 그조차 시간이 남기고간 삶의 편린임에 틀림없다.
그 중에서도 강화도의 직물산업과 관련된 근대건축물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들이다. 강화도에서 직물산업이 발전한 것은 강화도의 대표적인 공예품이던 화문석을 만들어내던 강화인들의 야무진 솜씨로 볼 때 그 시원은 아주 오래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기반 덕택에 일제강점기 경기도에서는 강화군에 산업기수를 두어 직물업을 장려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경기도는 강화직물협회에 1910년부터 1929년까지 8,414원의 보조금을 지급하였는데, 이는 당시 경성직물조합에 이어 경기도에서는 두 번째로 많은 보조금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까지는 대부분 수공업형태의 직물공업이었고 1936년 3월 31일 조양방직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면모를 갖추었다.
강화지역의 직물산업은 해방이후에도 이어져 1970년대 강화의 제조업은 직물제조업이 주류를 이루었다. 당시 제조업체로는 심도견직공업(주), 이화견직공업사, 경도직물, 남화견직, 평화견직, 동광직물, 경화방직(조양방직을 인수), 유신산업(주) 등이 있었다. 이러한 제조업체 중에서도 견직물을 생산하는 심도직물공업(주)와 면직물을 생산하는 유신산업(주)가 가장 많은 직물 제조기계를 보유하고 있었다.
답사코스별 근대건축물
1) 대한성공회 온수리 성당 및 사제관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한 기독교의 각 교파 즉, 북장로회·남장로회·북감리회·남감리회·캐나다장로회·오스트레일리아장로회 등은 효과적인 선교차원에서 상호간의 묵시적 동의, 또는 협의의 결과 각자의 독점적인 선교구역을 갖게 되었으나, 성공회와 구세군은 예외였다. 강화의 경우 감리교회의 선교영역이었는데, 성공회가 일찍부터 강화지역 선교에 착수하였다.
성공회는 감리교보다 조금 늦은 1898년 영국인 선교사 조마가(趙瑪可)와 의사인 노인산(盧仁山)이 강화에 들어와 선교를 시작하여 2년 후인 1900년에 강화부내 성현(城峴)에 성전을 신축하고 중앙전도구로 정하였다. 이들은 인쇄소를 차리고 교회책자를 인쇄반포하는 한편, 의약(醫藥)시설을 설치하고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이후 5, 6년 동안에 신자 김희준(金熙俊)·김군명(金君明)·곽한익(郭漢益)·김교창(金敎昌)·전대유(田大有) 등 100여 명이 영세를 받고 입교하였다.13)
성공회의 교세는 감리교에 비하여 미미하였다. 성공회는 이후 30여 년 동안 신도수가 늘어나 1931년 당시 신도수는 2200명이었다. 1931년 당시 성공회는 강화를 남과 북의 2개부로 나누었다. 북부는 신부 김희준이 관할하였는데, 북부교당인 강화부내 성현성공회를 비롯하여, 선원면 연리교회·하점면 망월리교회·양사면 인화리교회·삼산면 석포리교회·화개면 읍내리교회 등 6개 구가 속했다. 김영선(金永善) 신부가 관할하던 남부는 남부교당인 길상면 온수리교회를 비롯하여 길상면 초지리교회·불은면 넙성리교회·양도면 삼흥리교회·하도면의 내리교회·흥왕리 등 6개구가 속했다. (이상, 강화군, 신편 강화사)
<성당>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위치는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505-3이며, 대한성공회 ‘성 안드레 성당’이라고도 한다. 이 성당은 1906년 영국인 주교 트롤로프(Mark N. Trollope)가 지은 성당 건물로 한양(韓洋) 절충식 건물이다. 현재 이 성당에는 구 본당, 신 본당, 구 사제관, 신 사제관, 솟을대문, 단층 벽돌건물 등이 있다. 이 성당에는 원래 정문인 솟을대문과 본당, 사제관이 있었으며, 유치원을 운영하면서 단층벽돌건물을 세웠다. 현재 신 사제관에는 신부가, 구 사제관에는 전도사가 거주하고 있으며, 유치원으로 사용되던 건물은 장례식 등에 사용된다.
본당은 정면 3칸, 측면 9칸이며, 용마루 양 끝을 십자가로 장식하였다. 건물내부는 세부분으로 구성하여 바실리카 양식으로 처리했으며, 전면에는 집례공간을 배치했다. 정문인 솟을대문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는 종루도 있다. 대문의 벽체는 얼마 전까지도 회벽으로 되어 있던 것을 털어내고 원형대로 창살로 고쳤다.
<사제관>
성공회 강화 온수리 성당 사제관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41호로 위치는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505-7이다. 1898년 마가트롤프 신부 등이 강화에 부임하여 선교와 의료활동을 시작하면서 건축한 것이다. 벽돌조인 5량 4칸 집인 사제관은 먼저 세워진 강화성당과 같은 ㄷ자형의 건물이다. 사제관 위에는 성당이 있는데, 이는 건물을 위계에 따라 배치한 것이다.
/ 이상, 손장원, 다시 쓰는 인천근대건축에서 전재 /
2) 강화남문
강화내성은 관청리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강화내성은 현재 강화군청을 비롯하여 강화경찰서·강화우체국·고려궁지·강화향교 등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을 말하는데, ‘강화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의 강화내성은 동서남북문과 4개의 암문, 2개의 수문·남장대·북장대가 있었다. 현재 서문[瞻華樓]·남문[晏波樓]·북문[鎭松樓]은 복원되어 있고, 동문[望漢樓]은 강화군청에서 부지를 구입하여 복원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4개의 암문 중에 현존하고 있는 것은 소남문뿐이다. 수문은 상수문만이 복원되어 강화석수문으로 불리고 있다. 유적으로는 연무당·고려궁지·행궁·강화유수부 동헌·이방청·용흥궁 등이 있으며, 남장대·북장대는 터만 확인되고 있다. 내성의 둘레는 7122m, 높이는 3m 내외이고 너비는 4m 내외이며, 성가퀴의 높이는 1m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성 축조에 대해서는 ≪고려사≫에 아무런 기록이 되어 있지 않지만 강화에 궁궐을 짓기 시작하는 1232년을 전후하여 동시에 축조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가 있다.
그러나 강화의 성곽은 1259년에 몽골의 요구에 의해서 모두 헐리게 되었다. 당시 백성들은 축성과 훼성의 고통을 이길 수가 없었으나 몽골측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강행하였다. 이것은 몽골이 고려의 저항 근거지를 없앤 것이다. 효종 이후 강화내성 축조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기는 했지만, 이것을 시행한 것은 숙종 때였다. 이전에는 역사의 어려움을 들어 내성의 크기를 축소하고자 하였으나, 1710년(숙종 36)에 이르러서 현재 규모와 같이 남산을 포함하는 대규모의 산성을 계획하고 시행하였다.
부치 내성에 석성으로서 송악 이남 화산(花山, 지금의 남산) 이북에 의거하여 둘레 15리 343보 치첩수 1813의 규모로 완성한 것은 기존의 1658보의 구성(舊城)을 확장해서 축조한 것이다. 원래의 고려궁지는 현재 고려궁지 진입로 중간에 위치한 ‘김상용순절비각’에서 동서로 축조되어 내성의 한 지점에 연결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즉, 동쪽은 이곳에서 출발하여 성공회 강화성당을 지나 강화중학교 후면 내성과 연결되고, 서쪽은 현재의 강화읍사무소 뒤편을 지나 성광교회 능선을 따라 북문으로 연결되었다. 이것을 성벽으로 삼아 고려궁지, 조선의 내성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출처 : 강화군, 신편 강화사 /
3) 1928주택(일명 김참의원 고택, 황부자집)
황부자집 또는 김참의원 고택으로 불리는 이 집은 1928년에 세워진 중 2층 건물이다. 화강암 기단 위에 사각형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사각형 목제기둥을 세우고 보를 건 민도리집이다.
대청마루와 건넌방 앞 툇마루 외부에는 유리창을 설치하였다.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린 합각지붕이며, 처마 끝에는 함석 물받이를 설치하고 우수는 봉황모양으로 만든 토출구를 통해 배출되도록 했다. 지붕선은 물받이의 곡선과 어우러져 매우 날렵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부엌을 둘러싼 외벽하부는 적벽돌로 방화장을 만들고 중간에 난간을 둘렀다. 건물의 전체적인 양식은 한옥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난간 하부장식이나 처마를 받치고 있는 작은 기둥형태, 유리문 등에서 당시 고급주택에서 유행하던 장식을 살필 수 있다. 특히 이 집은 백범 김구선생이 망명 도중 변성명하고 강화에 머물면서 훈학하였던 제자의 집으로도 유명하다. 1947년 김구선생이 이 집을 방문하였을 당시에 촬영한 사진이 남아있다.
4) 합일초등학교
1901년 4월 1일 미국 선교사 조원시목사와 강화교회 목사 박능일이 협력하여 강화 최초의 교육기관인 잠두의숙(蠶頭義塾)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설립자가 변경되면서 사립 잠두합일학교, 강화합일학교 등으로 교명이 바뀌었다. 합일학교가 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1916년 교감으로 부임한 최상현의 노력에 힘입은 것으로 1929년 4월 그는 자신소유의 토지 595,044㎡(18만평)을 학교를 위해 기부했다. 1923년 10월에는 연면적 466.1㎡규모의 벽돌조 2층의 교사가 완공되었으며, 1935년 8월에는 135.5㎡규모의 교사가 증축되기도 했다. 해방이후에도 사립학교로서 교육사업을 계속했으나, 재정난으로 1983년 10월 13일 공립으로 전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5) 강화중앙교회 역사자료관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항에 첫 발을 내 디딘 후 만 7년째 되는 1892년 가을, 제물포구역 책임자로 있던 존스(G. H. Jones, 趙元時) 선교사가 강화선교를 위해 강화읍 갑곶나루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강화남문을 통하여 강화성(江華城)에 들어가 복음을 전파하려던 계획이 강화유수의 완강한 거절로 입성하지 못하고 갑곶나루에서 며칠간 선교활동을 하다가 인천으로 되돌아갔다.
다음해 1893년에 인천에서 술장사를 하면서 제물포교회(현 내리교회)를 다니던 강화 서사면 시루미 (현 양사면 교산리 송산마을)출신 이승환이 고향에 돌아와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면서 강화복음 전도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에 힘입어 존스는 제물포 교인 이명숙(李明淑)을 강화전도인으로 파송하여 이승환 댁을 거점으로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교항마을의 초시 김상임(金商壬)과 그의 가족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교항교회가 설립되었고, 3년 후인 1896년에 이웃 면 송해면 상도리 홍의마을의 한학자 박능일(朴能一)이 자기 집에서 서당학생 20여명과 종순일, 권신일과 함께 홍의교회를 설립하여 강화의 두 번째 교회가 탄생되었다.
1900년 9월 1일, 홍의교회에 출석하던 주선일․박성일․허진일․김봉일 등에 의해 강화읍 천교하(川橋下, 강화읍 신문리)의 여섯 칸 반짜리 초가집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서 강화중앙교회가 설립되었다. 다음해 4월 존스 선교사의 협조로 기와집 25칸, 초가집 16칸을 구입하여 교회를 현 위치로 옮겼다.
이때 소요된 상당한 금액은 존스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오하이오주 매리에타(Marietta)에 살고 있던 교인, 찰스 오토(Charless Otto)가 보내 준 기금으로 충당되었다. 이로서 8년 전 존스가 강화성에 입성하려던 꿈을 강화토착인들에 의해 이루게 되었다.
이 교회는 설립 8개월 만에 강화에서 가장 넓고 큰 예배당을 마련하게 되었으며, 강화 선교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후 한옥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교인들이 늘어나자 1914년에 다시 교인들의 정성어린 헌금과 미국 선교회의 도움으로 서양식 모양의 새 교회를 건축하였다. 이 교회당은 여러 차례 개축하며 사용하여 오다가 2000년에 헐고 1,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현재의 건물이 세워졌다.
/ 출처 : http://cafe.daum.net/coreasan1 /
6) 조양방직(朝陽紡織)
조양방직은 우리나라 사람이 세운 최초의 인조견회사로 강화지역의 대표적 지주 가운데 하나였던 홍재묵이 강화읍 신문리 588번지에 세운 회사이다. 이 회사는 설립과 동시에 건축을 시작하여 그해 9월 2일에 공장건물이 준공되었고, 조업은 9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직조기 15대를 설치하고 인조견을 생산했지만, 이후 공장증축과 기계증설로 번성기에는 연면적 2,314.1㎡의 공장과 사무실은 물론 노가미식 직조기 30여대를 갖추고 있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인조견은 외국산에 비해 품질이 좋아 국내는 물론 만주와 중국에까지 수출되었고 연간 매출목표액은 50만원에 달했다. 조양방직이 세워진 것은 토지자본의 일부와 고리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러나 1942년 일본 삼정(三井, 미쓰이) 산하에서 일하던 이세현(李世賢, 창씨명 : 高松世賢)에게 조양방직을 20만원에 인도함으로써 자본전환에 실패하고 말았다.
7) 강화양조장
강화양조장은 1931년 5월 31일 최창희가 관청리 146번지에 설립한 주조회사로 1934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양조장 건물은 일본식 목조 2층 건물로 지금도 과거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현재의 건물은 당초에 비해 규모가 축소된 것으로 원래는 현재 양조장에 접한 상가건물 터도 양조장 건물로 사용되던 곳이다. 한편, 1936년 7월 일제는 흉작을 이유로 당시 15개에 달했던 양조장을 5개로 축소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강화군에서는 15개소의 양조장이 있는데 군 당국에서는 갑자기 지난 8월 16일부로 도 당국의 방침이라는 구실로서 선원(仙源) 등 8개 양조장에 대하여 주류제조 영업허가취소를 권유하는 등 1월 1일부터 주류제조를 일체 금지하고 읍내의 강화양조주식회사와 길상면주류양조장, 하점면농창양조장과 삼산면 합하여 5개 양조장에서만 주류제조를 제한한다. 이에 대하여 8인은 금번문제가 생활안도를 좌우하는 사건으로 현재 각 도와 군을 통하여 여차한 예가 별로 없는 이만큼 군당국에서의…… / 출처 : 강화군, 신편 강화사 /
8) 새 시장
새로 세워진 시장이라는 뜻으로 ‘새 시장’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현재는 건물이 노후되고 상권기능이 쇠퇴하여 도로변에 면한 점포에서는 영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내부 상가는 선술집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불법증축으로 도로의 폭이 좁아져 일부 통로는 통행이 불가능한 수준이다.
9) 이화직물 공장건물
강화읍 관청리 569에 위치한 견직물 생산회사로 남궁 형이 설립한 회사의 공장이다. 현재는 방직기가 설치되었던 건물, 준비부, 염색부 건물 및 공중변소가 남아있으나, 건물은 매우 노후된 상태이다.
10) 한일은행
강화슈퍼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은 이 건물은 한때 한일은행으로 사용되었던 건무이다. 단층 벽돌조 건물로 지붕에는 기와를 올렸으나, 현재는 그 위에 방수를 위해 청색도료가 칠해져 있는 상태이다.
11) 강화예식장
강화읍 관청리 555에 위치한 목골회벽조 단층건물로 현재는 불교관련 용품을 판매하는 상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확한 건축연도는 확인하지 못한 상태이나, 대략 일제강점기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내부에는 신랑, 신부와 주례가 서는 단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출입구 바닥과 원형 기둥하부는 모자이크 타일로 마감되어 있다.
12) 진무영 터
13) 강화천주교회
- 1801년에 순교한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이 1795년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후 선교 활동
- 1846년 5월 김대건 신부는 강화 주변 지형과 해로를 지도로 작성하여 선교사들의 입국에 도움
- 병인양요이후 대규모의 순교와 박해
- 병인박해 이후 강화지역에서의 천주교 시발 : 이아가다
- 이아가다의 부모는 서울 작골에 살고 있었는데 1846년 병오년 박해를 피해 충청도 홍성으로 이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슬하에 3남매를 두고 살았는데 1866년에 부모가 순교하자 3남매는 유리걸식
- 두 남매는 어린 나이에 죽고 이아가다만 강화읍 대산리에 오게 되어 1871년 김해 김씨와 혼인을 하고 대산리 3번지 돌모루에서 살면서 남편을 세례 받도록 함
- 이아가다는 1893년에 딸 김부엉 루이사(Louisa)를 낳았는데, 루이사가 9살 되던 해에 제물포 본당 구내 샬트르 바오로 수녀회가 운영하고 있던 보육원으로 보냄
- 보육원에서 자라던 김루이사가 17세 되던 1909년에 당시 답동본당 주임 드뇌(Euge′ne Deneux, 전학준, 1873∼1947) 신부가 루이사와 동갑인 영종도 교우 안일만 바오로와 혼인하도록함
- 1922년 봄 안일만 가족은 돌모루로 이사하여 슬하에 안영진(安永珍, 일명 순홍) 아가다와 안경옥 필립보, 안경남 라우렌시오 3남매를 키우면서 신앙을 전하기 시작
1925년 충청도에서 올라온 안야고보가 하점면 부근리에 옹기점을 열면서 공소(公所)를 세웠고, 1928년에는 충청남도 서산군 팔봉면에서 이주해온 교우 양촌명 외 9명이 1933년 6월에 온수리공소를 설립하고 인천 답동본당 신부의 지도를 받았다. 1935년 경기도 포천 출신의 이재명(야고보)이 안일만의 장녀 안순례(아가다)와 혼인하여 강화읍 관청리에 살면서 전교활동에 힘써 1940년 관청리 이용매(아가다)의 자택에 공소를 설립하였다.
그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전교활동이 잠시 중단되었다가 1952년 이재명은 당시 이북에서 피난 온 최명선(바오로)의 집을 공소로 정하고 전교활동을 재개하였다. 1956년 이재명을 중심으로 신자들이 성당 부지를 매입하기 위해 성금 20만 환을 모금하고 노기남 주교로부터 10만 환을 보조받아 총30만 환에 강화읍 관청리 산643번지 대지를 구입하였다.
1957년 11월 11일 김포본당 관할의 강화공소로 공식적인 인준을 받은 후, 1958년 1월 본당 설립인가를 받고 장금구(크리소스토모) 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로 임명되어 2월 5일에 부임하였다. 장금구 신부는 이재명이 살던 집을 개조하여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1958년 10월 인천과 부천, 38선 이남의 황해도에 소속된 도서 지방이 인천 감목대리구(監牧代理區)로 설정되고 미국의 메리놀 외방전교회(Maryknoll Missioners)가 이 지역의 포교를 맡게 되었다. 서울교구 소속이었던 장금구 신부가 1959년 5월에 떠나고, 강화본당에는 2대 본당주임으로 메리놀회 소속인 토마스(Thomas McKee) 신부가 부임하였다.
맥키 신부는 메리놀회의 원조를 받아 1960년 8월 14일에 성당을 건립하였는데, 화강암과 벽돌을 이용한 석조 건물로서 연건평 150평에 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며 총공사비는 2만 4000불이 소요되었다. 당시 신자 수는 720여 명, 예비자는 1000여 명이었다. 1961년 6월 6일 인천이 대목구로 승격되자 강화 역시 서울교구에서 인천교구로 관할이 이관되었다.
/ 출처 : 강화군, 신편 강화사 /
14) 심도직물 터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직물업계는 서서히 그 틀이 잡혀가고 있었다. 면직은 금성방직, 대한방직, 경성방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모직은 제일모직, 태평방직이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견직에서는 심도직물, 이화직물, 선경직물이 메이저 회사였으며, 그 중에서 심도직물이 가장 큰 회사였지만, 면직이나 모직회사에 비해서는 작은 규모였다.
강화지역의 대표적인 직물회사였던 심도직물의 경우에는 한 때 연간 매출액이 61억에 달하기도 했던 회사이다. 관청리 394번지에 있었던 심도직물은 1947년 김재소가 설립한 회사로 우리나라 직물업계에서 인지도가 높은 회사였으며, 전성기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싱가폴, 홍콩 등에 제품을 수출하기도 했다. 회사로 월급날이면 강화군 전체가 들썩거렸고, 1991년 11월 회사가 부도로 문을 닫을 때는 직원과 주민들은 눈물의 이별식을 갖기도 했다.
[강화] 가톨릭노동청년(JOC)운동 정신에 입각한 강화도 JOC의 정당한 임금지불 및 노동시간 준수 등 노동운동이 현지의 20개 직물업자들의 부당한 반응으로 시비가 벌어졌다. 이 시비는 4일 ‘심도직물’에서 동 직물노조 분회장을 해임한 후 시작하여 업주들이 천주교 신자는 채용 않기로 결의하고 강화본당 JOC 지도신부의 성무집행방해, 노동운동지도 방해를 하고 현지 경찰서장이 지도신부에게 ‘반공법 위반’ 운운으로 협박하는가 하면 업주측 노동자들의 시위 등이 벌어졌다.”(가톨릭시보 1968년 1월 21일자 3면)
부당한 고용거부에 맞서다
휴전 이후 50년대 연평균 16.5%라는 경이적인 신자 증가율을 보였던 한국교회는 60년대 접어들어 증가율이 연평균 6.2%로 급락했다. 70년대에는 5.2%로 더 떨어졌다. 이는 교회의 선교 정책에 일대 전환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공의회는 사회 정의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새롭게 촉발했는데, 당시 한국 사회는 급격한 산업화와 독재의 압박 속에서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들의 극단적인 소외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에 따라 교회는 사회 정의와 인권 수호를 위한 사회 참여가 곧 시대적 요청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사건이 바로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이다. 이 사건은 JOC 회원들이 중심이 된 노조를 업자와 경찰이 일방적으로 빨갱이로 몰아붙이면서 천주교 신자들은 고용하지 않겠다고 지역 업자들이 결의를 한 것에 대해 교회 전체가 강력하게 대응한 것이다.
강화본당 JOC는 강화도내 직물업계 노동자들로 노동조합 결성을 돕고 임금인상 투쟁과 노동시간 시정운동을 벌이면서 업주들의 노동자 착취 및 학대 시정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한 조합에서 이 운동이 성공해 임금이 인상되고 노동시간이 단축됐으며 이것이 여러 조합으로 확산되자 업주들은 노동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나섰다.
가톨릭시보가 전하는 당시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국회의원 김재소가 운영하는 심도직물에서 4일 섬유노조 심도직물 분회장을 근무 태만으로 해임하자 노조원 350명이 구성당 구내에 모여 해임 경위를 듣고 있었다. 경찰관 20여명이 이들을 불법 집회로 몰아 주모자 4명을 연행해갔는데 회사측에서 제시한 4명은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 그리하여 주모자 배후에 전(田)신부(JOC 강화본당 지도)가 있다는 구실을 잡아 7일 열시쯤 주일미사를 드리고 있는 전신부에게 김재소 의원, 경찰서장, 정보계장, 기자 2명이 몰려갔다. … 그날 오후 4시 심도직물은 ‘천주교 전 미카엘 신부의 부당한 간섭으로 공장운영 관리가 마비되었으므로 무기휴업함’이라는 쪽지를 굳게 닫힌 정문에 붙여놓았다.”(가톨릭시보 1968년 1월21일자 3면)
가톨릭시보는 후속보도를 내면서 노동자들을 위한 교회 활동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주교단은 14개 교구장이 서명한 ‘사회정의와 노동자 권익보호 위한 주교단 성명서’를 통해 강화본당 신부와 신자들의 정당한 노동자들을 위한 모든 활동을 지지하며 인간의 기본권은 어떤 이유에서든 수호돼야 하고 기업주들의 부당한 억압이나 해고는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교회가 사회 현실에 들어간 첫 사건이었고, 이후 교회 안에 노동문제가 일반화되는 계기가 됐다. 박영호 기자 young@catholictimes.org
15)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성베드로와 바울로성당’이라고도 하는 이 성당은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250에 위치하고 있다. 1981년 7월 16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강화군이 인천광역시에 편입되면서 1995년 3월 1일에는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31호로 지정되었다. 2001년 1월 4일에는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424호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10년대까지 강화 지역 선교의 중심이 되었다. 성공회 신학교인 성 미가엘 신학교가 이곳에 설립된 이후에는 성공회 한국선교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대한성공회의 초대주교인 고요한(Charies Jone Corfe) 신부가 1900년에 세운 성공회 성당이다. 언덕 위에 위치한 이 성당은 정문, 종각, 본당, 사제관의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건물배치는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가 되자’는 뜻으로 배 모양으로 지었다고 한다. 정문은 솟을대문형식의 삼문이며, 종각에는 십자가가 부조된 범종이 있다. 처음 만들었던 종은 일제말기 징발되었으며, 현재의 종은 1989년에 설치한 것이다. 맨 뒤에 위치한 사제관은 ㄷ자형 건물로 이 또한 우리나라 전통양식의 건축물이다. 사제관은 화재로 소실되어 20여 년 전에 새로 세운 것이다. 사제관 뒤에는 성당사무실, 유치원, 식당으로 사용되는 부속건물이 있다.
본당은 정면 4칸, 측면 10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정면에는 ‘천주성전(天主聖殿)’이라고 쓰인 현판이 있다. 현판 밑에는 주련이 걸려있는데, 주련 위에는 연꽃무늬 장식이 있다. 외부는 우리나라 전통건축물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내부는 삼랑식(三廊式) 바실리카 양식이다. 이 당시에 세워진 다른 종교건축물과 달리 서양식 장식이 거의 없는 순수한 한식 목조건물로 기둥사이에는 벽돌을 쌓았다. 외관은 2층이지만, 내부는 높은 천장의 단층이다. 내부에는 지붕을 지지하고 있는 총 20개의 기둥이 있다.
/ 이상, 손장원, 다시쓰는 인천근대건축에서 전재 /
16) 용흥궁
이 용흥궁(龍興宮)은 조선 제25대 철종이 왕이 되기 전에 거처하던 잠저(潛邸)이다. 조선 철종 4년(1853)에 초가집이던 것을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기와집으로 개축하고 용흥궁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이 용흥궁의 배치는 서울에 있는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으로 지어 질박한 느낌을 준다. 경내에는 철종이 머물던 옛 집터임을 표시하는 비(碑)와 비각(碑閣)이 있다. 조선 광무 7년 (1903) 청안군 이재순이 보수하였으며, 강화군에서 1974년 보수를 시작으로 수차에 걸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출처 : http://www.ganghwa.incheon.kr (강화군청 홈페이지) /
17) 연미정
이 정자의 최초 건립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고종이 구재(九齋)하기 위하여 학생을 이곳에 모아놓고 면학(勉學)케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후 조선 중종 5년 (1510) 삼포왜란 때 방어사가 되어 왜적을 무찌르고, 중종7년 (1512) 순변사가 되어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황형에게 이 정자를 하사하였다 한다.
이곳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줄기는 강화해협(염하강)으로 흘로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 하여 연미정(燕尾亭)라 하였다 한다. 높은 석주위에 세운 팔작집으로 영조 20년(1744) 중건, 고종 28년(1891) 중수 등 수차에 걸쳐 보수하였다. 조선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시 이곳에서 청국과 강화조약(講和條約)을 체결 한 곳이기도 하다.
/ 출처 : http://www.ganghwa.incheon.kr (강화군청 홈페이지) /
본 답사자료는 신편 강화사(강화군청), 강화군청홈페이지, 건축잡지 와이드(제3호)에 수록된 ‘강화도에서 근대건축을 찾다’와 관련 문헌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답사자료의 내용 사용 시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십시오.
◦ 소식지 「해반」 격월로 발간
◦ 문화의 거리 만들기 운동- 월미도 문화의 거리에서 1998,1999년 매주 토요일「해반토요문화마당」을 개최하였으며 화도진공원에서 2000년 화도진토요문화마당을 개최하였다.
◦ 예술인과 함께하는 문화의 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문화․예술인을 초청하여 자유스럽고 편안하게 예술인들의 작품세계나 예술세계를 듣는 자리로 문화예술에 관심이 있는 일반시민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행사이다.
◦ 기획행사
「열려있는 땅 인천 展」 「한중문화교류- 중국우수판화가 展」 「한국우수판화가 展」「명․청판화 」展, 「해반 10+2 展」
◦ 해반가족문화행사 -한길야간고등학교 월1회 시사강의, 년2회 회원답사
◦ 지역연대사업 - 경륜장반대시민대책위원회, 계양산골프장반대시민대책위원회, 인천항살리기시민협의회, 학교도서관살리기인천시민모임, 인권영화제주관단체, 인천참여예산네트워 등
⑤ 대표자명 안 재 현 ( 이사장 / 변호사)
⑥ 단체구성 및 주요임원 명 단
◦ 정 회 원
지역사랑․문화사랑․인간사랑의 뜻을 같이하는 분이라면 누구나 환영입니다. 사)해반문화사랑회의 운영에 직접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정회원의 회비는 월 1만원 이상 보내주시면 됩니다.
◦ 후원회원
뜻을 같이 하지만 직접적인 참여가 어려운 분도 후원금을 (월2,000원 이상) 보내 주시면 후원회원이 되실 수 있습니다. 적극적인 참여가 가능할 때는 언제든지 정회원으로 활동하실 수 있습니다
◦ 이 사 : 김근영, 김민배, 김인수, 문병호, 박상문, 안재현, 유재흥, 이명분, 이원철, 이 윤, 이흥우, 최기은, 최정숙, 한치화, 황치일 (15명)
◦ 감 사 : 김귀복, 문상범 ( 2명)
◦ 운영위원 : 권양녀, 권해형, 김근호, 김명순, 김현윤, 김휘동, 노광수,손장원, 서원경, 오은숙, 오태호, 이수석, 이준한, 이 진, 전영우, 최휴종, 홍상의 (17명)
◦ 사 무 국 : 김영순, 백영임, 오은숙 ( 3명)
⑦ 회원수 450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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