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근대 학교와 인물
인천의문화/해반문화사랑회
2010-10-12 00:14:25
인천의 근대 학교와 인물
문상범(제물포고등학교 교사)
1. 인천의 학교 현황
2010년 4월 1일 현재 인천의 학교 수는 초등학교는 공립 220개교, 사립 5개교, 국립 1개교로 합계 226개교이고, 중학교는 공립 117개교, 사립 11교로 합계 128개교이고 고등학교는 공립 82개교, 사립 31개교, 국립 1개교로 합계 114개교이다. 여기에 특수학교 7개교, 고등기술학교 1개교, 각종학교 1개교를 더하면 총 477개교에 이른다. 인천에 이렇게 많은 학교가 있나하고 놀라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나, 이는 인천이 수도권에 위치하여 전입 인구가 많았고, 인천의 광역화로 영역이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온 결과이다.
동구에는 초등학교가 8개교, 중학교가 공립 1개교, 사립 3개교가 있고, 고등학교는 사립학교만 4개교, 각종학교 1개교가 있다.
2. 인천의 근대 학교
1) 선교와 근대 학교
인천의 변화와 성장은 인천의 개항과 밀접하다. 인천은 강화도조약 체결로 부산, 원산에 이어 1883년 개항되며 외세의 각축장으로 변모되었으며, 한편으로는 갖가지 새로운 서양문물이 유입되는 첫 관문이 되었다. 이로 인해 인천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수많은 기록을 가진 곳이 되었고, 교육 분야 또한 그 중의 하나이다. 인천항을 통해 입국한 기독교 선교사들은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교육사업과 의료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는 인천지역 근대교육의 시발점이 되었다. 즉 내리교회의 미국 선교사 존스(George Heber Johns, 한국명 : 趙元始) 목사는 1893년 3월 12일 영화학당을 설립하여 남학생들을 교육하였다.
영화학교의 초창기 명칭은 1904년에 세워진 교사의 현판에 ‘BOYS, DAY SCHOOL’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매일소년학교’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永化)’라는 이름은 안골예배당(내동예배당) 건물을 빌려 수업하던 영화학당 시절에 한문을 가르치던 박용래가 지은 것으로, ‘영(永)’은 영생(永生)을 의미하고 ‘화(化)’는 바른길로 인도한다는 뜻으로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이름이다.
영화학교는 여러 번 경영난에 봉착했는데, 동아일보 1936년 4월 18일자에는 “인천 영화보통학교가 경영난을 이유로 5·6학년생을 무기 휴학시키자 학부형회가 반대하다.” 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광복 이후에도 경영난을 겪다가 1970년 폐교되었다.
2) 근대 여성교육의 시작
한편, 1892년 4월 30일 존스목사의 부인(Mrs. George Heber, Jones) 또한 자기 집에서 한 명의 여아를 데리고 신식 교육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현재 영화정보산업고등학교와 영화초등학교의 전신인 영화여학당의 시작이었다. 영화여학당은 1900년 4월 2일 존스 여사의 집에서 안골예배당의 뒷방으로 옮겼다. 이때 학생은 7명이었다. 1902년에는 미국인 카루렌이 희사한 돈 1,000달러로 싸리재(경동131번지)에 대지 396㎡(120평)을 구입, 벽돌 교사를 짓고 1903년 9월 30일 이사했다. 그때 학생은 47명이었다. 1909년 여름에 미국인 카루렌이 다시 1,000달러를 희사하여 싸리재의 학당 대지와 교사를 팔고 합쳐서 쇠뿔고개(牛角里, 현 창영동)에 대지 4,046㎡(1,226평)을 구입하고 건평 2층 교사를 1911년 건축했다. 현재 영화초등학교 본관은 초기 건축에 1954년 건물 출입구 돌출 부분을 증축한 것 이외에는 원형이 그대로 잘 남아있어 인천광역시 지방 유형문화재 39호로 지정되어 있다.
3) 인천의 근대 초등교육기관
인천에는 영화학교 이외에도 여러 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 사립학교로는 박문학교, 제녕학교, 인명의숙, 의성사숙, 동명학교가 공립학교로는 신흥초등학교, 창영초등학교, 축현초등학교, 송림초등학교 등이 설립되어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박문학교는 천주교 신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자녀를 대상으로 초급과정의 교육을 실시하면서 기독교 전도에 힘쓰던 속칭‘천주학방’이 발전하여 1900년 9월 1일에 답동의 현 가톨릭회관 자리에서 인천항사립박문학교로 개교되었다. 김교원(金敎源)과 강준우(姜準雨)가 설립하였으나, 1909년 3월 프랑스 신부인 전학준(全學俊, Eug. Deneux)을 설립자겸 학교장으로 변경했다.
1914년 6월에 여자부가 설치되고 여자부 교사 6학급이 신축되었고, 다음 해 6월에는 남자부 교사 6학급이 신축되었다. 1917년 두 학교를 합병하여 인천박문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전학준 신부가 설립자 겸 학교장이 되었다. 2000년 9월 1일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다음 해 9월 1일 연수구 동춘동에 새 교사를 지어 이전하였다. 박문초등학교가 오늘의 명문이 되기까지 전학준 신부와 임종국 신부 등 역대 답동성당 신부들의 노고가 컸다. 이곳 출신의 많은 사람들이 사회 각처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특히 장면 박사를 선배로 두고 있는 것은 이 학교의 자랑이다.
인명의숙은 1903년 자강회 인천지회장이던 정재홍(鄭在洪)이 우각리에 설립한 학교로 당초에는 천기의숙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이 학교는 인천신상협회와 미상협회 등을 비롯한 인천지역 유력 사업가들로부터 많은 의연금을 모금하여 학교를 운영하였다. 1912년 4월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로 통합되었다. 학교건물을 해체하여 인천공립보통학교의 본 교사를 증축하는 데 사용했다.
제녕학교는 1899년 인천에서 처음으로 독정리의 유지들이 사립 일신학교를 세운 데 영향을 받아 1904년경 서상빈(徐相彬, 1859∼1928)이 설립한 사립학교였다. 이 학교에서는 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 출신의 수재들이 인천세관의 관리로 근무하면서 야학 형태로 영어와 신학문을 가르쳤다. 개교식에 학부대신 등 정부의 요인이 다수 참석하였다. 러일전쟁(1904~1905)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관립외국어학교는 관립일어학교로 바뀌고, 제녕학교의 영어 수업도 금지되었다. 1907년 인천공립보통학교(창영초등학교)로 흡수되었다.
의성사숙은 인천의 마지막 선비로 알려진 김병훈(金炳勳, 1863~?)이 1908년 동구 창영동에 설립한 학교이다. 사숙은 규모가 작은 마을의 종합학교로 조선시대에 있었던 서당과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명학교는 인천 노동자 야학의 등불이었다. 1931년 동명학원이란 이름이 정식으로 붙여지면서부터 일제강점기에 적잖이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인천의 대표적 민족학교인 동명학원은 박창례를 중심으로 결성된 관서야학을 근간으로 한다. ‘동명(東明)’이란 이름은 고구려를 개국한 동명성왕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식과 민족교육의 산실 역할을 한다는 의미였다. 광복이 되면서 학생이 급격히 증가하여 기존의 공간(198㎡)은 너무 비좁아 1946년에 종두제조소로 사용했던 건물을 불하받아 이전하였다. 이곳이 지금의 동명초등학교이다. 1997년 이전만 해도 동명초등학교의 일부 교사로 사용했던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의 흔적을 쫓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현대식 건물로 신축되어 과거의 종두제조소나 동명학원의 자취를 찾을 수 없어 아쉬움이 크다.
인천공립심상고등소학교(신흥초등학교)는 일본인을 위해 만들어진 학교였다. 인천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늘어나며 자녀 교육의 필요성이 커져만 갔으나 당시 인천에는 일본인 자녀 교육을 위한 시설이 없었다. 이에 1883년에 동본원사 인천별원의 승려들이 일본인 자녀 교육을 시작했다. 이것이 오늘날 인천신흥초등학교의 전신인 심상소학교(인천공립심상소학교)의 출발이다. 1885년에 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1890년에 관동 1가 8번지 일대의 가옥 및 토지를 구입하여 교사를 새로 지었다. 1908년 신흥동에 교사를 새로 지어 옮겼다. 1913년 9월에 고등소학교와 병합하어 인천공립심상고등소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광복 후 1946년 3월 15일 인천신흥국민학교로 개교하고 그 해 7월에 48명의 졸업생들을 첫 배출하면서 인천의 명문 초등학교로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인천공립보통학교(창영초등학교)는 순수 민족자본으로 1907년 4월 3일에 관립 인천일어학교 안에 임시교사를 설치하고, 5월 6일에 학생 3명으로 개교하였다. 그 해 6월에 사립 제녕학교를 병합하면서 74명의 학생을 받아들였는데, 계속 학생들이 늘어나 12월 20일에 우각현(현 창영동)에 목조 건물을 세워 이전하였다. 1910년 3월 26일에 첫 졸업생 18명을 배출했고, 1912년에 이르러는 학생 수가 348명에 달했다. 같은 해 사립 인명학교를 통합하여 여자학급을 신설하였다. 또 인천공립간이상업학교가 부설되어 7월 18일부터 수업을 시작했다. 1941년 4월 1일 국민학교령에 따라 인천창영공립국민학교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본관 건물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현재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천공립심상소학교(축현초등학교)는 1919년 4월에 창립되었다. 인천공립심상고등소학교의 취학 학생이 계속 증가하자 용강정(인현동) 부지에 공립심상소학교를 설립하였다. 1919년 3월 25일에 교사를 준공하여 4월 1일부터 인천공립심상고등소학교 학생 659명을 받아 들여 새로운 학교로 출발하였다. 광복 후 1946년 9월에 인천축현공립국민학교로 바뀌었다. 2001년 3월 1일 연수구 옥련동 405번지에 새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고, 이 자리에는 학생교육문화회관이 들어섰다.
송림초등학교는 1933년 4월 인천공립보통학교(창영초등학교)에서 일부 학생을 데리고 인천제2공립보통학교로 개교했다. 1938년 4월 인천제1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되었다가 1941년 4월 1일에 인천제1공립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이후 인천송림초등학교로 개칭되었다.
4) 공립교육으로 시작된 인천의 근대 중등교육
인천의 중등교육은 초등교육과는 달리 공립교육이 먼저 시작되었다. 남자 학교는 인천고등학교가, 여자 학교는 인천여자고등학교를 꼽을 수 있다.
2010년 2월 제109회 졸업식을 거행한 인천고등학교는 1895년 개교하여 115년 역사 속에서 개교와 더불어 몰려 온 외세에 맞서 민족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노력해 온 인천 교육의 산증인이자 자존심이 되는 학교이다.
1895년 4월 선포된 교육칙어(勅語)에 따라 칙령 제79호로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학교법규인 한성사범학교 관제가 공포되고, 5월에 칙령 제88호로 외국어학교 관제가 공포되어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가 설립되며 인천공립상업학교(인천고등학교 전신)가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인천감리아문 내 경무서를 교사로(내동 84번지) 개조하여 일본어 교육을 시작하였다. 개교식은 6월 27일에 있었다. 일본어 교육을 주 내용으로 하는 이외에도 수신, 한문, 수학, 지리, 역사, 이과, 정치, 경제, 법률, 부기, 체조 등의 교과목을 교육하였다. 수업연한은 4년이었다. 개교 당시의 입학생은 30여명이었으며, 1898년 5월 25일에 첫 졸업식을 가졌고 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두 번째 입학생은 첫 신입생이 입학한 3년 뒤로 15명의 학생이 입학했다.
1904년에 교육행정의 주도권이 일제의 손으로 넘어 가며 관립 인천일어학교로, 1909년 관립 인천실업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1912년 이른바 제3차 교명 변경이 있어 인천공립상업학교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1922년 3월 31일에는 감리서 교사에서 송림동 교사(현 송림초등학교)로 이전하였다. 이후 1933년 4월 1일 인천남공립상업학교와 병합되어 율목동 신축 교사로 이전하였다.
한편 1933년에 인천공립상업학교와 통합된 인천남공립상업학교는 일본인을 위한 학교였다. 일본인 청년들이 영어 연구를 위하여 1887년 경 영국인을 초빙해서 만든 모임인 인천영학사가 그 시작이다. 영어 모임은 몇 차례 중단되다 1892년 1월에 성공회의 랜디스 박사를 초빙해 교육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랜디스 박사가 따로 영어야학을 개설하자 학생들이 그곳으로 옮겨 가 버려 인천영학사의 학생 수는 급격히 감소하여 문을 닫게 되었다. 1897년 1월에 다시 문을 열고 1908년에 사립교육위생회와 합쳐 인천상업야학교가 되었다. 이후 여러차례 교명 변경이 있었고 1922년 4월 인천남공립상업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1933년 4월 1일 율목동(현 정보산업고등학교)에 신 교사를 준공하여 이사한 인천공립상업학교로 흡수되었다. 인천공립상업학교는 1946년 9월 1일 인천공립상업중학교가 되었다가, 1951년 8월 30일 인천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자리는 인천고등학교가 주안으로 이사 간 후 중앙초등학교가 이용하다가 현재는 인천정보산업고등학교가 이용하고 있다.
인천공립고등여학교는 1908년 4월 1일 창립 당시에는 인천여학교로 지칭하기도 했는데, 주로 재봉기술을 교육하였고 수업연한은 3년, 정원은 1개 학년을 50명으로 전교생의 수는 150명이었지만, 1910년 4월 1일에는 인천고등여학교로 개칭하고 4년제로 편제하였다. 1911년 4월 1일 재외지정학교로 인가를 얻어 인천공립실과고등여학교로 개칭, 1913년 4월 1일에는 인천공립고등여학교로 개칭하였다. 1926년 7월에 인천전환국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1,782㎡(540평) 규모의 2층 벽돌 건물의 교사를 신축하여 9학급 학교로 확대되었다. 인천고등공립여학교는 1945년 해방 전까지 총 2,261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나 그 중 한국인이 76명에 불과하여 일본인을 위한 학교였음을 알 수 있다.
광복 후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통합된 6년제 인천여자고등학교로 인가되어 운영되다가, 1951년 8월 31일에 인천여자중학교가 분리 되었다. 1961년 2월 28일에는 상인천여자중학교 9학급이 병설되었다가, 1970년 3월 1일에 상인천여자중학교가 분리 되었다.
인천지역 여학생의 교육을 담당하던 인천여자고등학교는 1998년 7월 29일 연수구 연수동 신축 교사로 이전하였다. 1946년 발생한 화재로 1926년 준공한 건물이 모두 타 버리고 한국전쟁 이후에야 새 교사를 신축하여 학교의 면모를 갖추었던 인천여자고등학교 자리에는 동인천주민센터와 인천중구문화원이 들어 와 있다.
사립 중등학교로 역사가 깊은 학교는 동산고등학교와 박문여자고등학교가 있다. 동산고등학교의 전신인 인천공립상업전수학교는 1938년 7월 이흥선(李興善, 1877∼1975) 등 인천 유지들이 힘을 모아 세운 인천 최초의 민족사학인 인천상업강습회를 모태로 한다. 인천상업강습회는 이듬해 율목동에서 3년제 인천상업전수학교로 개편하고 학생 120명, 교사 3명으로 시작했다. 이흥선 외에 유군성(劉君星, 1880-1947) 등이 창씨개명, 조선어교육 탄압이 극심하던 때 청소년들에게 우리말과 우리글을 교육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지금의 동산중고등학교의 전신인 인천상업전수학교 설립에 공헌했다. 1941년 11월 현재 자리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1946년 6월 11일 6년제 동산중학교로 개칭했다. 1951년 8월 동산중, 고등학교로 개편하여 오늘에 이른다.
박문여자중고등학교는 장석우(張錫佑, 1871~1942)가 1940년 5월 18일 소화고등여학교란 이름으로 송림초등학교 교사 일부를 빌려 개교하였다. 1941년 11월 부평의 경찰종합행정학교 자리로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1945년에 답동성당에서 소화고등여학교 재단을 양도받아 임바오로 신부가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박문여자중학교로 개편하였다. 1951년 8월 박문여자고등학교를 병설하여 중학교 6학급, 고등학교 6학급이 되었다. 1955년 부평의 교사를 매도하고 1956년 8월 현재의 본관 교사를 신축해 이전하였다. 현재는 노틀담수녀원에서 맡아 운영하고 있다.
3. 동구 교육 인물
박창례
박창례(朴昌禮, 1910∼1983)는 중구 도원동에서 태어났다. 1남2녀 중 막내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렵게 살았다. 1923년 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정신여중에 입학하나 가난으로 포기하고,와세다(早─田)대 2년 과정을 수료했다.
1930년 도원동의 보각선원 강당에서 관서학원(關西學院)을 세워 이옥녀(李玉女)와 함께 성냥공장과 정미소에서 일하는 어린 직공에게 한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일본 경찰의 간섭이 심했고, 학생들로부터 학비를 받지 않고 운영하였기 때문에 6개월 만에 문을 닫았으나, 이듬해 유동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하고,광복 후 송림동에 있던 종두제조소를 인수하여 동명초등학교 터를 만들었다. 1982년 제1회 교육대상을 수상하고, 1983년 10월 만인평등교육 실천을 제자들에게 당부한 뒤 눈을 감았다.
조석기
백파(白派) 조석기(趙碩基, 1899∼1976)는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경상북도 영양군에서 태어나 서울로 유학해 1919년 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고등학교) 사범과를 나왔다.
1946년 창영초등학교 10대 교장으로 부임하여 1961년까지 15년 동안 근무했다. 그는 창영초등학교를 근대교육의 산실로 만들고자 했다. 자율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어린이 집회활동(대의원회·임원회 등) 실시, 어린이신문 발행, 어린이방송국, 어린이우체국, 어린이은행 설치, 야구·축구·수영·연극부 등을 두어 가르쳤다. 또한 국내 처음으로 보이스카우트와 걸스카우트를 조직하였다.
유군성
유군성(劉君星, 1880∼1947년)은 1880년 강화 월곶리에서 출생하였다. 인천에서 29세에 목재상을 시작하고, 1924년 중구 신흥동에 유군성정미소를 설립하여 경영하며 국내를 대표하는 사업가가 되었다.
그는 동구 송림동에 위치한 동산중고등학교의 탄생에 기여했다. 1938년 설립된 인천상업강습회가 이듬해 3년제 6학급의 인천상업전수학교로 개편되는데, 유군성은 5명의 설립위원 중의 한명으로 재정을 담당하여 이흥선(李興善, 1877∼1975)과 함께 돈을 거둬 지금의 동산중학교 자리를 마련했다.
그러나 일제 말기 화재와 미두 실패로 사업이 차츰 기울게 되어 말년을 매우 궁핍한 가운데 생을 마쳤다. 하지만 재산을 정리하면서 자식들뿐 아니라 부리던 사람들에게도 재산을 골고루 분배하는 데 인색치 않았던 인물이다.
이흥선
이흥선(李興善, 1877∼1975)의 가족은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황해도에서 김포로 이주했고, 이흥선은 9살에 혼자 인천에 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던 미두거래소 사환으로 취직하였다. 19세에 회사를 그만두며 퇴직금으로 받은 1천환(10억원 상당)으로 1918년 중구 유동에 인흥정미소를 차렸다. 1936년엔 석유와 곡물업을 겸한 인흥상사를 차려 인천의 10대 부호 중 한명이 되었다.
한편 민족사학을 하나 둘 폐교시키는 데 혈안이 된 일본의 식민교육정책에 맞서 미래 인재를 육성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여 인천경제계 유지들과 뜻을 모아 그가 헌납한 재산으로 인천상업강습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박창례의 동명학원이 건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장석우
강화 출신 장석우(張錫佑, 1871∼1942)는 1900년을 전후하여 주명서, 김용태 등과 주단 포목점인 서흥태를 운영하여 재력가로 급성장하였다. 1905년 정치국(丁致國, 1865~1924) 등과 함께 일본 상인에 맞서 인천조선인상업회의소를 창립하여 부회두(부회장)를 맡아 활동하며 경제계를 이끌었다.
그는 영화학교(인천영화초등학교)와 인천공립보통학교(인천창영초등학교)의 운영비를 지원하고 1940년 부평보통학교(인천부평초등학교)에 대지를 기부했다. 한국인 여성 교육을 위하여 1940년 인천소화고등여학교(박문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수를 6대4로 하여 1940년 인천송림공립심상소학교(인천송림초등학교)에서 개교했다.
광복 후 외아들 장광순 씨가 학교를 천주교 측에 기부하여 현재의 박문여자중고등학교가 탄생했다.
김병훈
김병훈(金炳勳, 1863~?)은 인천의 마지막 선비로 불리지만,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근대교육이 도입되기 직전에 의성사숙이라는 마지막 글방을 운영하였다. 제자인 고유섭(高裕燮, 1905~1944), 한국 근대 서예가 박세림(朴世霖, 1925~1975), 유희강(柳熙綱, 1911~1976) 등 제자의 면면을 볼 때 그는 한국 근대 예술의 뿌리인 셈이다. 그의 교습법은 특이해서 새벽에는 글을 해석하고 설명해 암기시켰으며 글씨 내기를 권장해 스스로가 분발하고 격려하는 경쟁심을 갖게 했다고 한다.
정재홍
정재홍(鄭在洪)의 집은 서울 남소동 장충단 앞에 있었으며, 상업에 종사했다. 종교는 개신교였다. 1903년 자강회 인천지회장이던 그는 인명의숙을 설립하였다. 1907년 6월 30일 12시 박영효(朴泳孝, 1861~1939)의 귀국환영회에서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이날 환영회에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가 오면 사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토오가 나타나지 않아 분개하여 자살한 것이다.
출처 : 2010년 해반문화사랑회 골목문화해설사 교육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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