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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반문화사랑회

도시의 잔주름, 인천 골목

by 형과니 2023. 6. 15.

도시의 잔주름, 인천 골목

인천의문화/해반문화사랑회

2010-10-12 00:10:55

 

도시의 잔주름, 인천 골목

유동현(굿모닝인천 편집장)

 

지금 인천은 성형수술 중이다. 어제 보았던 골목이 불도저의 삽날 아래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있다. 이제 골목은 추억을 지나 이미 역사로 가고 있다.

 

한 집, 두 집이 모여서 만들어낸 공간인 골목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여기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들로 한 지역의 문화와 역사의 첫 줄이 된다. 무심코 지나치는 허름한 골목길에도 인간사의 크고 작은 내러티브가 더덕더덕 붙어 있다. 오래된 골목은 압착된 시간이 켜켜이 저장된 기억의 창고이자 우리가 살아온 역사이자 문화이며 문화재다. 골목은 마음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부터 바로 조금 전 벌어진 이야기까지 모든 걸 들려준다.

 

# 피란민 골목에서 노동자 동네로 바통

 

인천의 골목은 근대화와 산업화의 과정에서 깊게 패인 도시의 잔주름이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사람의 얼굴이 변하는 것처럼 도시의 모습도 바뀐다. 한 도시가 어떤 주름살과 어떤 피부, 어떤 눈빛을 갖게 되는가는 전적으로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도시의 모습은 그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닮기 때문이다.

 

골목은 사람이 만든다. 인천의 골목은 개항 이후 파란만장했던 도시발전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인천골목의 첫 번째 주인공은 개항을 맞아 일자리를 쫓아서 올라 온 팔도 사나이들이다. 억척스럽게 일을 해서 어느 정도 안정된 자리를 차지한 그들은 고향의 식솔과 친지들을 불러들여 한동네에서 함께 살게 된다. 인천에는 경상도 사투리와 전라도, 충청도 말투를 사용하는 골목들이 형성된다.

 

이어 625 사변이 터지면서 인천은 전쟁통에 밀려들어 온 피란민에게 또다른 거처를 내준다. 그들 대부분은 이전에 사람이 살지 않았던 산등성이나 구릉지에 터전을 마련함으로써 달동네 풍경을 만들어 냈다. 실향민들 중 많은 사람이 성실하게 돈을 모아 산동네를 빠져 나갔고 그 자리를 산업역군들이 차지했다. 6,70년대 인천에는 노동집약적 산업과 중후장대한 산업이 발전하며 많은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일자리를 찾아 전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공장 주변 동네로 스며들면서 인천은 급격히 도시화가 되었다.

 

# 골목마다 동질감 형성

 

골목은 이동하는 통로이자 동시에 머물러 쉬는 마당이다. 그곳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 만남이 이뤄지고 동질감이 형성되었다.

 

개항장인 중앙동과 관동 일대는 일제(日帝)에 의해 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계획지구로 골목길이 격자형(格子型)으로 반듯반듯하다. 구불구불 산등성이의 지형대로 지은 집들이 모인 우리네 골목과는 사뭇 다르게 빤질거리는 개항장 동네였다. 아직도 100년 가까이 된 석조건물들이 골목길을 따라 남아있어 근대건축물 노천박물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송학동은 부자 동네였다. 사람 키 서너 배 넘게 쌓은 돌축대와 담쟁이로 둘러싸인 높은 담장 그리고 넓은 정원과 육중한 철문. 감히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저택들이 바다를 향해 자리 잡고 있었다. 실제로 4, 5대 국회에서 국회의장을 지낸 곽상훈 씨 등 고관대작이나 항만관련 사업을 하던 경제인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

 

# 대한민국 대표 달동네, 송현동

 

송현동은 전국에서도 소문난 달동네였다. 이곳의 거주민은 3차에 의해 형성된다. 1차 입주민은 일제강점기 때 중구 전동에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쫓겨난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2차는 625동란 때 피난민이 내려와 엄청난 규모의 산동네를 형성했다. 그들은 곧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임시 거처를 마련했지만 반백년(半百年)을 살고 말았다. 3차는 전국에서 모여든 공장 노동자들로, 우리나라 산업화의 불꽃을 피어낸 장본인들이다.

 

남의 집 마루와 안방을 지나야 자기 집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기형적인 가옥들과 아침이면 길게 늘어선 공중변소의 모습이 일상이었던 송현동 달동네는 2001년에 인천에서 처음으로 대단위로 재개발이 되었다. 집을 허물 때 전국의 고물상들이 다모여 들었고 서민들의 희로애락이 진하게 스며있는 진기한(?) 물건들을 트럭 채 실어갔다는 후문이 있다. 뒤늦게 동구청에서도 물건을 수습해 현재의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을 건립했다.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섰지만 그 언저리에는 아직도 이런 곳이 있구나라고 신기해 할 정도로 진한 골목의 맛이 배어난다.

 

화평동 골목은 냉면의 이단아세숫대야 냉면 때문에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6.25 사변 이후 화평철교를 기점으로 경인철로 변을 따라 무허가 집과 가게들이 들어섰다. 1980년대 초 인근 화수시장에서 3,4평 정도의 소규모 냉면집을 운영했던 상인들이 동인천역으로 가는 길목인 이곳에 하나 둘 개업을 하면서 냉면골목이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화평동은 냉면으로만 이야기하기에는 아쉬운 동네다. 화평동 골목에는 우리나라 연극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의 태가 묻혀 있다. 극작가 함세덕(19151950)1915년 화평동 455번지에서 태어났다. 1936조선문학에 희곡 산허구리를 발표하면서 연극계에 얼굴을 내민 뒤 391막짜리 단막극 동승으로 일약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무의도 기행’ ‘도념(道念)’ ‘해연20여편의 역작을 남겼다. 그러나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40여년 간 우리는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한 함구 대상작가였다. 그의 생가는 현재 소주방으로 변해 버렸다. 낡았지만 조부 함선지, 부친 함근욱 2대가 누린 68평의 한옥 기와집의 골격은 그대로 남아있다.

 

# 부두와 함께 늙어가는 사람들

 

화수동은 느린 것을 부끄럽고 쓸모없는 것으로 조롱하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아날로그식 표정을 짓고 있는 동네다. 한때 바다에서 건져 올린 온갖 생물로 인천에 젖을 물렸다. 세월이 흘렀지만 어느 때 가도 냄새와 소리로 인천인의 몸속에 체득된 강렬한 추억을 이끌어내는 몇 남지 않은 곳이다.

 

6,70년대 연평도 조기잡이 배들이 드나들던 우리나라 3대 어항 화수부두에는 수협공판장, 얼음공장, 어구상점, 식당 등이 즐비했고 새우젓 배들이 입항하는 날이면 큰길까지 비릿한 난장이 서곤 했다. 이제 화수부두는 도시의 오지(奧地)가 되었다. 문명도, 문화도, 세인의 관심도 모두 비껴 간 안쓰러운 부두가 되었다. 두산인프라코아 뒤편 공장의 거대한 옹벽 뒤로 숨어 버린 어촌 마을에는 부두와 함께 늙어간 사람들이 힘겹게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들의 인기척이 그나마 부두를 지키고 있다.

 

화수동 ‘183번지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태동한 곳이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한국의 산업화 과정 속에 노동 운동과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의 불씨를 키워온 곳이다. 회원들은 위장 취업을 통해 직접 현장에 들어가 이른바 노동자 의식화사업을 펼쳤다. 인천산선은 김근태 등 유력한 민주화 운동가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화수동 주변에는 동일방직, 대우중공업(현 두산인프라코어), 이천전기, 한국유리 등 큰 공장들이 많이 있었다.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은 화수동으로 출근해 하루 종일 산선이 있던 골목에 진을 치곤했다.

 

인천의 대표적인 골목 중 또 다른 곳이 율목동이다. 이곳은 한때 인천의 유지들이 모여 살면서 기와 한옥촌 골목을 형성했다. 위쪽 전망 좋은 곳으로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면서 2층 다다미방 일본집들이 속속 자리 잡았다. 광복 후 그들은 떠났지만 골목에서 세라복을 입은 일본여학생이 뛰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던 곳이다. 1990년대 만해도 일본인들은 옛 추억을 회상하거나 자기네 옛 가옥구조를 연구하기 위해 종종 방문하기도 했다. 빌라 건축 붐이 이곳에 밀어닥치면서 이제는 한옥 보기가 가뭄에 콩나듯 힘들어졌고 일본집도 하나씩 자취를 감추고 있다.

 

# 낡은 인천 사진첩의 소재들

 

신흥동 수인역에 가면 마치 등 굽은 노인네 같은 노쇠한 철길 때문에 슬프다. 이제 수인역은 도심 후미진 곳에 물러나 있다. 아파트에 가려져 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지만 아직 철길은 살아있다. 철길 따라 사람들도 살아있다. 닿을 듯 말 듯한 간격으로 철길과 마을이 사이좋게 공존하며 삶을 이어 가고 있다.

 

1937년 협궤열차 수인선이 건설되었고 철로는 정미소가 있던 수인역에 닿았다. 기차가 서는 곳에 사람과 물자가 몰려들었고 자연스럽게 마을이 들어선 것이다. 1979년 종착역이 송도역으로 변하면서 급격히 쇠락하였다. 이제 수인역은 젊은 택시기사들은 그 위치를 잘 모를 정도로 도시의 뒷무대로 한발짝 물러 앉아있다. 지금은 농산물 대신 포항에서 실은 철강 코일과 강원도에서 실은 시멘트와 석탄을 채운 화물차만이 하루에 10여 차례 지나간다.

 

그렇지만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열차 때문에 생긴 시장은 그 명맥을 이어 가고 사람들도 남아 있다. 곡물상과 고추집 그리고 기름 짜는 집 등 40여개의 점포가 신광초교 담벼락에 기대어 수인곡물시장이란 이름으로 장사를 하고 있다.

 

이밖의 인천 골목길은 저마다 특유한 얼굴과 모양새를 갖고 있는 낡은 사진첩과도 같다. 자신의 삶을 미군부대에 의지하고 살았던 양공주들의 터전이었던 백운역 인근의 신촌지역 골목, 나병환자들이 닭을 치며 천형(天刑)을 극복하면서 삶의 끈을 놓지 않았던 십정동 골목 그리고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통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탄 만석동 골목 등은 인천의 과거, 그리고 엄연한 현재의 사진첩을 구성하는 소재들이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내쉰 공기가 만들어낸 기억과 시간이 훑고 간 삶의 흔적이 있다.

 

출처 : 2010년 해반문화사랑회 골목문화해설사 교육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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