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의 과거와 현재 지울 수 없는 풍경
仁川愛/만석부두 관련 스크랲
2010-10-12 00:08:25
김학균
1883년 인천항(당시 제물포 포구)이 개항되면서 외국의 여러 조계가 설치되었으며, 한국인들은 그 외곽에 거주하게 되었다. 현재 중구청과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중앙동, 북성동, 항동, 송학동, 송월동 일대는 일본과 청국을 포함한 각국의 조계지로 외국인들의 거주지가 형성되어 기존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은 조계지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인근의 구릉에는 촌락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개항이 이루어지면서 통상이 활발해지자 부두 주변에는 시가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변두리였던 동구 일대에는 각지에서 온 노동자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개항 이후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동구의 송림동, 화수동, 창영동, 화평동 일대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이 형성되었지만 송현동 일대는 여전히 큰 거주지가 형성되지는 않았다. 당시만 해도 송현동 일대는 갯벌과 바닷물이 드나드는 물길, 갈대밭이었기 때문에 거주지로서는 부적절했기 때문이다. 190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면서 일본군들이 중구의 전동 근처에 주둔하면서 그곳의 주민들을 송현동으로 내쫓았다고 한다. 이때 밀려난 주민들이 수도국산 기슭에 모여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송현동 일대가 커지게 되었다.
이와 함께 만석동, 화수동 일대의 해안선을 따라 제강, 목재, 방직, 중공업 등을 위한 공장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일자리가 늘어나고 공장 노동자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공장이 밀집해 있던 화수동, 만석동 외에도 송림동, 금창동, 송현동까지 노동자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마을이 확장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마을이 커지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이들이 먹고 마시고 생활하는데 필요한 물건을 팔고 사는 상거래가 일기 시작하였다. 공식적인 시장으로 등록되지는 않았지만 주민들의 필요와 공간의 구조 등의 이유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며 주거형태에 따른 의식주로 변모되었다.
동구는 개항 이후 일본인들의 유입으로 인해 각국 조계지에서 밀려난 조선인들이 대거 모여들었던 곳이다. 또한 해안선을 따라 매립이 이루어지면서 화수동과 만수동을 중심으로 공장이 들어섰고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성장한 곳이다. 또한 동인천역과 만석부두, 화수부두라는 육로와 수로를 이용한 인적·물적 자원의 이동이 용이한 관계로 일찍이 서민 중심의 시장과 부대시설이 들어선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대거 정착한 곳이 동구이며 해변가를 위시한 지역으로 확산되어갔다. 때문에 동구는 근대의 역사와 문화를 보듬고 있는 역사문화 자원이 풍부했으며, 한국전쟁과 산업화를 통한 근현대적 문화유산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다.
특히 서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성장한 시장들이 밀집해 명멸해 갔고, 더러는 아직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송현시장 내에 있는 우물터나 공동 수도, 지금은 사라진 수도국산 달동네를 복원한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한국전쟁 이후 미군부대에서 물건을 가져와 팔면서 그 이름도 ‘양키시장’으로 더 알려진 송현자유시장 등등 시대를 관통하면서 사람들의 추억과 역사의 기록을 간직한 역사문화 자원들이 어떤 것은 누군가의 이야기 속에서 재생되고, 어떤 것은 당시의 모습을 잃었지만 희미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동구의 지명 유래와 역사문화자원
1) 지명유래
인천 동구 관할지역은 금창동, 만석동, 송림동, 송현동, 화수동, 화평동 등으로 과거 인천부 부내면과 다소면의 일부이다.
부내면(府內面)은 일명 읍내(邑內)라 불리며 ‘고을’관청이 있는 소재지 면을 뜻했다. 인천읍은 고려초부터 1914년까지 천년동안 인천지방의 중심지였고 부내면은 그의 소재지면이라 해서 부내면이 되었다.
다소면(多所面)은 수봉산에서 따온 지명이다. 수봉산(壽峯山)의 원래 이름은 수봉산(水峯山)이다. 그 뜻은 물에 둘러 쌓여 있는 산이란 뜻이다. 수봉산 동과 서에는 우물이 많았다. 옛날 산 주변에 논이 많았는데 우물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다소란 우물이 많다는 뜻으로 이 이름을 따서 면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이는 곧 옛날 논농사에 물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지명이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고 1903년 8월에 다소면 관할 선창리, 고잔리, 송림리를 떼어 새로운 부내면을 신설하였다. 이때 읍내에 있던 부내면은 구읍면이라 개칭하였다.
동구의 주택과 일생의례
1) 주택
인천 동구에는 오래 되거나 보존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건축물들이 몇 백년 이상된 가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역의 특성이나 건축학적 특성을 보여주는 건축물들이 많았다.
화평동 40-1번지에 있는 적벽돌의 공장은 일제시대에 지어진 공장이다. 건축물 대장에는 1945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화평동 토박이들에 의하면 해방 전에도 있었다고 한다.
이 공장은 1958년도판 전국기업체총람에는 김흥규씨가 대표이며, 함창기업(주)로 기재되어 있다. 이 회사에서 제조한 것은 연필로 나와 있으며, 정확한 설립일이 나와 있지는 않다.
주민들에 의하면 해방 이후엔 연필을 제조하였고, 60년대엔 못을 제조하였다가 70년대 이후엔 쌀을 쌓아두는 창고로 운영이 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에 공장은 상가와 주거지로 개조되었다. 현재 6개의 점포가 들어서 영업을 하고 있고, 3가구는 주거공간으로 거주하고 있다.
화평동 23번지의 한옥은 1936년에 지어졌으며, 2대 인천시장이었던 표양문이 거주하였던 곳이다. 표양문은 해방 후 인천 부윤을 지내다 2대 인천시장까지 지낸 사람이다. 인천시장을 지냈을 당시에 거주하였다고 하니 아마도 1950년대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송림동 194-5번지의 일본식 2층 저택은 송림동 한옥 여관에서 동사무소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나온다. 마당에는 향나무 2그루가 있고, 건물 외관은 흰색의 작은 타일로 치장이 되어 있다. 마당에는 음식을 저장할 수 있는 창고가 있다. 건물내부는 현 주인이 1년 전에 이주하면서 개조하였다고 한다. 개조하기 전에는 현재 거실이 방으로 되어 있었고 그 밑에 반공호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방과 방 사이에 복도가 있고, 2층으로 올라가면 또 방이 있었다고 한다. 외풍이 심해 지금은 복도를 막고, 위층 방도 막아 전체적인 구조를 살펴보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건축물대장에 등기가 안 되어 정확한 건축연한은 알 수 없으나, 주변 토박이 분들의 말에 의하면 일제시대에 지어진 것이라 한다. 이 주택에는 일제시대때 인천경찰서장을 지낸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인천경찰서장을 지낸 이는 흑소력미(黑沼力彌, 1923. 6. 15 ~ 1923. 11. 4), 웅기희일랑(熊崎喜一郎, 1938. 3 ~ ), 안천어莵송(岸川於莵松, 1930년 근무), 안천어토송(岸川於菟松, 1932. 4 ~ 1935. ), 수하상오랑(手賀常五郞, 1921. 10 ~ 1924. ), 병동의웅(兵働義雄, 1913. 9. 1 ~ 1914. 9. 30), 궁관정일(宮館貞一, 1909 ~ 1915. 1), 고교류지진(高橋留之進, 1929. 2 ~ 1932. 4) 등이다. 이 중에 한 사람이 이 주택에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추후 이들의 주소지를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해방이 되면서 집은 한국사람에게 불하되었고, 후에 이필상씨란 분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이 주택도 현재 재개발지역에 포함되어 철거 위기에 놓여있다.
금창동 배다리에 있는 인천양조장과 양조장 옆의 한옥은 오래 전부터 있던 건축물이나 현재 공장은 ‘스페이스 빔’이 사용하고 있으며, 양조장 옆의 한옥은 양철지붕으로 겉을 감싸놓아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또한 송림동 공용주차장이 있는 곳에 ‘천수당한의원’이 있다. 이 건물은 세워진 것은 1957년이지만, 건축의 형태가 거주와 점포를 겸한 형태로 건축되어 있어 송림동 일대의 다른 한옥과는 조금 다른 형태이다. 송림동 222번지는 과거 생활이 넉넉한 사람들이 살던 부촌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한옥들은 넓은 평수와 좋은 기와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2) 일생의례
인천 동구의 일생의례는 토박이들 위주의 삶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이주하여 살다보니 한가지로 특징지을 수 없다. 조사과정에서 만난 제보자들은 각각의 의례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시대가 변화하여 모든 의례를 예식장, 식당, 장례식장에서 치루기 전까지는 각자의 방식대로 의례를 치러왔다. 인천에 예식장, 식당, 장례식장 등의 상업적 공간이 생긴 것은 오래 되었으나, 이곳을 이용할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상업적 공간을 이용하게 된 것은 경제적 여유가 생긴 80년대가 되면서부터이다.
3) 출생의례
출생의례의 공통적인 것은 아이가 태어나면 출산을 알리는 표시로 금줄을 치는 것이다. 금줄에는 아들이 태어났을 때는 숯과 고추를 딸이 태어났을 때는 숯을 끼운 것이다. 금줄을 치는 이유로는 잡인의 출입을 금하고 아이가 태어났음을 알리기 위함이다.
현재 40대에 접어든 사람들이 출생했을 때는 동네에 ‘백산파’라는 조산원이 있어 이곳에서 출산을 많이 하였다. 백산파조산원은 방이 여러 개 있는 기와집으로 아이를 출산할 때가 되면 이곳에 가서 낳았다. 이곳에 가면 백산파가 아이 낳는 것을 도와주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미역국과 밥을 차려 준다고 한다. 당시 금액에 대해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 하지만, 적은 돈은 아니었다고 한다. 현재의 ‘백산길’이 탄생된 이유이다.
4. 동구 사람들
사람들의 삶을 한 가지 방식으로 단정 짓기보다는 다양한 삶을 기록함으로써 인천 동구에서의 삶이 얼마나 다양하고 열심히 살았는가를 남기기 위함이다. 인천 동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도 있고, 혼인한 후에 이주한 사람도 있고, 한국전쟁 때 피난 왔다 정착한 사람도 있고, 1960년대 이후 밥벌이를 위해 이주한 사람도 있다. 인천 동구로 사람들이 많이 유입된 시기는 인천지역의 인구유입시기와 비슷하다. 일제시대 밥벌이를 위해 공장이나 부둣가 하역일을 하기 위해 인천 동구로 이주하였다. 부모세대에 의한 이주로 그 후손들은 자의적이라기보다는 타의적인 사례이다.
이주 후 만석동 근처에 판자집을 짓거나 만석동과 가까운 곳의 여관에서 ‘달방’을 얻어 거주하는 형태였다. 만석동에는 판유리공장, 제철공장, 방직공장, 부두 하역 등의 노동 제공처가 많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북에서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혹은 사상을 피해 내려온 사례들이다. 이 당시 가족들이 같이 내려온 경우도 있지만, 잠깐 피해 있으면 될 것으로 생각하여 혼자 내려온 사례들도 많다. 잠깐 피할 생각으로 내려왔기에 빈손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들이 자리잡은 곳은 수도국산이나 수문통 개천변 등의 임자가 없는 공지였다. 이러한 곳에 판자로 집을 짓고 살면서 돈을 모으면 이사 가는 옆집을 매입하여 평수를 늘여가는 방식으로 주거지를 확대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판자촌은 1980년대 들어서면서 지역개발이나 수문통복개공사로 없어지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를 넘어가면서는 '이촌향도’현상으로 고향을 등지고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울로 이주한 사람들도 많았으나 항구도시의 특성중에 하나로 굶어죽지 않는곳이 인천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밀집되게 되었다. 수문통과 수도국산의 달동네는 이렇게 형성된 곳으로 동구만의 지난한 삶의 현장 아니 삶의 냄새가 있는 곳으로 제2의 고향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출처 : 2010년 해반문화사랑회 골목문화해설사 교육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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